검은반도 - 1부 조용한 침투 (7화)

 제1부 조용한 침투

제4장 첫 번째 프레임

제1절 변절자라는 말



선거판에서 사람을 죽이는 말은 대개 짧았다. 설명이 길면 힘을 잃었고, 논리가 복잡하면 대중은 등을 돌렸다. 그러므로 선거를 오래 겪은 사람들은 안다. 한 인간의 삶 전체를 무너뜨리는 데 필요한 것은 두꺼운 자료집이나 긴 연설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술자리와 택시 안과 엘리베이터 앞에서 쉽게 따라 말할 수 있는 한 단어라는 것을.

그날 아침, 장천길에게 던져진 단어는 ‘변절자’였다.

처음 그 말이 나온 곳은 대통민정당의 공식 논평이 아니었다. 어느 대학 출신 정치평론가가 새벽 라디오 시사 프로그램에서 장천길을 두고 “젊은 시절의 신념을 팔아 보수의 외투를 입은 사람”이라고 말한 것이 시작이었다. 진행자는 웃으며 “그 표현이 좀 세다”고 했고, 평론가는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저는 정치적 변절의 전형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말은 거기서 끝났지만, 단어는 끝나지 않았다. 라디오를 들은 누군가가 그 문장을 잘라 온라인에 올렸고, 그다음에는 제목만 남았다.

‘운동권 출신 보수 의원 장천길, 변절자인가 현실주의자인가.’

정오가 되기 전까지 그 제목은 수십 개의 변형을 낳았다. 장천길은 변절자인가. 변절의 정치학. 청년 장천길은 어디로 갔나. 보수의 옷을 입은 과거 운동권. 자유우국당의 불안한 얼굴. 대통민정당 청년 대변인은 논평에서 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는 않았지만, “민주화의 언어를 빌려 권력의 사다리를 오른 뒤, 이제는 반대편에서 과거의 동지들을 조롱하는 정치가 있다”고 말했다. 누구를 겨냥한 말인지는 모두가 알았다. 직접 부르지 않은 이름은 때로 더 크게 들린다.

장천길 의원실의 아침 회의는 그 단어 하나 때문에 처음부터 흔들렸다. 국회 의원회관 7층 끝 복도에 있는 그의 사무실은 다른 의원실과 마찬가지로 좁고 복잡했다. 벽에는 지역구 행사 사진과 정책 토론회 포스터, 주민들과 찍은 사진들이 빼곡히 붙어 있었다. 평소에는 커피 냄새와 전화벨 소리, 프린터 돌아가는 소리가 뒤섞여 작고 분주한 기계처럼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날은 모든 소리가 어딘가 억눌려 있었다. 보좌진들은 모니터를 보면서도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전화기를 든 인턴은 통화가 끝나자마자 한숨을 삼켰다.

지명길은 밤새 정리한 지역구 일정표를 들고 회의실에 들어오다 말고 멈춰 섰다. 벽면 TV에 장천길의 얼굴이 떠 있었다. 화면 아래 자막에는 큼직하게 적혀 있었다.


운동권에서 보수 핵심으로… 장천길, ‘변절 논란’ 확산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눌렀다. 장천길은 회의실 맨 안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 회색 양복 차림에 넥타이도 매지 않은 모습이었다. 머리카락은 늘처럼 단정했지만, 눈 밑에는 잠을 설친 흔적이 있었다. 그는 화면을 보지 않았다. 대신 회의실 탁자 위에 놓인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날 밤 지명길과 노민지가 발견한 바로 그 사진이었다. 눈 덮인 국경 도시 같은 배경, 희미한 남자들의 실루엣, 그리고 뒷면의 암호 같은 표기. BY-91. WHN-2.

노민지는 이미 회의실 한쪽에 서 있었다. 흰 셔츠 위에 남색 재킷을 걸친 그녀는 밤새 잠을 자지 않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눈은 맑고, 말투는 차가웠다. 그녀 앞에는 밤새 모은 기사 제목과 온라인 반응, 방송 클립 목록이 펼쳐져 있었다.

“프레임이 빠르게 굳고 있습니다.”

장천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민지는 이어 말했다. “대통민정당 쪽은 ‘변절’로 치고 들어올 겁니다. 참의당 쪽은 조금 다르게 갈 가능성이 큽니다. 그쪽은 ‘노동과 약자의 언어를 버린 사람’ 정도로 접근하겠죠. 문제는 자유우국당 내부입니다. 우리 당 안에서 방어를 해 줄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지명길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방어를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겁니다. 의원님 과거가 있으니까요.”

노민지가 그를 바라보았다. “그 말, 밖에서 하면 우리부터 죽습니다.”

“사실을 말한 겁니다.”

“정치에서 사실은 혼자 걸어 다니지 않아요. 늘 제목을 달고 다니죠. 지금 제목은 변절자입니다.”

지명길은 입을 다물었다. 노민지의 말은 차가웠지만 틀리지는 않았다. 그는 그런 점이 싫었다. 틀리지 않은 말이 꼭 옳은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거판에서는 그런 말들이 자주 이겼다.

장천길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민정당에서는 누가 움직였나.”

“공식 라인은 아직 조심합니다. 먼저 치고 들어온 건 외곽입니다. 평론가, 유튜브 채널, 친대통민정당 성향 온라인 매체, 시민논객. 전형적인 간보기입니다.”

“당에서 직접 때리기 전에 여론 온도를 보는 거군.”

“네.”

“우리 당은?”

노민지가 잠시 뜸을 들였다.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 말에 회의실 안 공기가 더 무거워졌다. 공격보다 더 아픈 것은 때로 침묵이었다. 장천길은 자유우국당 소속이었지만, 자유우국당은 그를 끝까지 자기 사람으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는 시장경제와 안보를 말했고, 한미동맹을 중시한다고 말했지만, 그의 젊은 시절 이력은 언제나 당 안쪽에서 작은 가시처럼 남아 있었다. 운동권 출신. 학생회 간부. 1990년대 초반 러시아 극동 지역 방문. 시민단체 활동. 그 이력들은 필요할 때는 ‘중도 확장성’이 되었고, 불리할 때는 ‘정체성 의심’이 되었다.

장천길은 탁자 위 사진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었다. “이건?”

지명길과 노민지는 동시에 사진을 보았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명길이 답했다. “봉투를 보낸 사람도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의원님께 직접 전달하려 했던 것 같습니다.”

노민지가 덧붙였다. “저는 일단 이 사진을 지금 프레임과 분리해서 보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가 일부러 동시에 던진 걸 수도 있습니다. 변절자 프레임과 백야 쪽 떡밥을 한데 묶으면, 의원님 과거 전체가 의혹 덩어리가 됩니다.”


“백야.”


장천길이 그 단어를 낮게 되뇌었다. 회의실 안 사람들이 모두 그를 보았다. 그는 마치 오래전 들은 적 있는 멜로디를 기억해 내려는 사람처럼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는 그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해.”

지명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라는 뜻입니까?”

장천길은 대답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1991년 겨울,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그 비슷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아. 아니, 들었다기보다 누군가가 적어 둔 걸 본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너무 흐릿해.”

노민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지명길은 속이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장천길은 그동안 자신의 과거 운동권 활동을 숨긴 적이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방문에 대해서는 늘 짧게만 말했다. “청년 교류 행사였다.”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많았다.” “별일 없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제 그 별일 없었다는 말 뒤에서 알 수 없는 이름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강윤호. 백야. BY-91. WHN-2.

전화벨이 울렸다. 의원실 대표전화였다. 인턴이 밖에서 전화를 받다가 곧바로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의원님, 지역구 사무실 쪽에서 전화가 계속 온답니다. 어르신들 몇 분이 기사 보시고, 의원님이 예전에 정말 대통민정당 쪽 사람이었냐고…”

말끝이 흐려졌다. 장천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받아. 설명은 길게 하지 말고.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 경력은 사실이고, 지금은 자유우국당 소속 국회의원으로서 지역과 나라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해.”

“네.”

인턴이 나가자 노민지가 곧바로 말했다. “그 문장 안 됩니다.”

“왜.”

“너무 방어적입니다. 인정하고 해명하는 구조로 가면 상대 프레임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장천길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

“이렇게 가야 합니다. ‘장천길의 정치적 여정은 변절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변화와 함께한 현실적 책임의 확장이다.’ 조금 더 줄이면, ‘신념은 바뀐 것이 아니라 책임이 커졌다.’”

지명길이 얼굴을 찌푸렸다. “너무 만들어진 말입니다.”

“선거 메시지는 원래 만들어지는 겁니다.”

“사람 말 같지가 않잖아요.”

“사람 말 같아서 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장천길은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지명길은 정치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고 믿는 보좌관이었다. 노민지는 사람이 정치 안에서 살아남으려면 먼저 프레임을 이겨야 한다고 믿는 보좌관이었다. 둘 다 자신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자신을 인간으로 지키려 했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을 정치적 자산으로 지키려 했다. 장천길은 둘 중 어느 쪽이 더 위험한 충성인지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그때 노민지의 휴대전화가 짧게 진동했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자마자 아주 미세하게 표정이 굳었다. 지명길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노민지는 곧바로 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누구야?” 지명길이 물었다.

“광고 대행사 쪽.”

“지금 광고 대행사가 이 타이밍에?”

“선거철에 광고 대행사가 연락하는 게 이상해?”

“이상하게 받았잖아.”

노민지는 그를 차갑게 보았다. “지금 우리한테 필요한 건 서로 의심하는 게 아니라 대응입니다.”

지명길은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보았다. 화면에 뜬 이름은 광고 대행사가 아니었다. 한자와 영문이 섞인 저장명. L.J.H. 베이징. 그는 모른 척 수첩을 펼쳤다. 노민지도 그가 봤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두 사람 사이에 말 없는 선이 하나 더 그어졌다.

오전 열한 시가 되자 장천길은 국회 정론관 앞에 섰다. 공식 기자회견은 아니었다. 그러나 기자들은 이미 모여 있었다. 누군가는 그의 출근길을 기다렸고, 누군가는 의원실에서 흘러나온 일정을 보고 몰려왔다. 카메라 렌즈가 그를 향해 일제히 움직였다. 마이크에는 방송사 로고들이 붙어 있었고, 기자들의 질문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는데도 공간 전체가 소란스러웠다.



“의원님, 변절자라는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첫 질문은 예상대로였다. 누가 먼저 던졌는지조차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공식 질문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장천길은 잠시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수십 개의 렌즈 뒤에는 각기 다른 얼굴들이 있었다. 궁금해서 묻는 얼굴, 이미 기사를 써 놓고 확인 문장만 원하는 얼굴, 누군가의 질문지를 대신 읽는 얼굴, 자신의 질문이 방송에 잡히기를 바라는 얼굴. 그중 어느 얼굴 하나도 완전히 악의적이지 않았고, 어느 얼굴 하나도 완전히 선의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시스템은 개인의 악의보다 훨씬 깨끗한 표정으로 사람을 몰아붙인다.

“변절이라는 말은 쉽습니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살아온 시간을 한 단어로 묶는 것은 늘 폭력적입니다.”

카메라 셔터 소리가 이어졌다. 장천길은 준비해 온 문장을 떠올렸다. 노민지가 만든 문장. 신념은 바뀐 것이 아니라 책임이 커졌다. 그러나 막상 입 밖으로 나오려는 순간, 그는 그 문장이 자신을 구할 수는 있어도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는 젊은 시절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외쳤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자유우국당 국회의원으로서 시장경제, 안보, 법치, 동맹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그것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이 바뀌었고, 대한민국도 바뀌었습니다. 누군가는 그 변화를 변절이라 부르고 싶겠지만, 저는 그것을 책임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노민지가 뒤에서 아주 조금 고개를 숙였다. 대체로 그녀가 준비한 방향 안에 있었다. 하지만 장천길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제 과거를 문제 삼는 것은 얼마든지 좋습니다. 정치인은 검증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검증이 아니라 조작된 의심, 누군가가 설계한 낙인찍기라면 저는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기자들 사이에 미세한 움직임이 일었다. 조작된 의심. 설계한 낙인. 제목이 될 만한 표현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의원님, 1991년 겨울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강윤호 씨와 함께 있었습니까?”

공기가 바뀌었다. 질문 자체보다 이름이 가진 낯섦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기자들은 강윤호가 누구인지 몰랐다. 그러나 장천길의 얼굴은 아주 짧게 굳었다. 짧았지만, 카메라는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지명길은 즉시 목소리의 방향을 찾았다. 회색 패딩을 입은 남자가 기자들 뒤편에 서 있었다. 목에는 출입증이 걸려 있었지만, 지명길은 그 얼굴을 본 기억이 없었다. 남자는 질문을 던진 뒤 더는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장천길은 대답하지 않고 한 박자 쉬었다. 그 침묵이 너무 길어지기 직전, 노민지가 한 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장천길이 손을 살짝 들어 그녀를 멈췄다.



“오늘은 제 정치적 이력에 대한 입장을 말씀드리는 자리입니다. 구체적인 사실관계는 확인해서 답하겠습니다.”

“강윤호 씨가 실종된 직후 의원님이 귀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이번에는 기자들이 웅성거렸다. 실종. 러시아. 귀국 기록. 단어들이 새로운 방향으로 튀기 시작했다. 장천길은 질문자를 바라보았다.

“소속이 어디십니까?”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사람들 사이로 물러났다. 지명길이 따라가려 했지만, 기자들과 카메라가 길을 막았다. 몇 초 뒤 남자는 복도 모퉁이 너머로 사라졌다.

질문은 끝났지만 질문이 남긴 것은 사라지지 않았다. 장천길은 더 이상 말을 이어 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짧은 입장 발표는 곧바로 종료되었다. 기자들은 각자 휴대전화를 들고 편집국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방금 생긴 이름 하나가 새로운 제목들을 낳고 있었다.


강윤호.


의원실로 돌아오는 길은 길고 짧았다. 국회 복도는 평소처럼 사람들이 오갔지만, 장천길 일행 주변만 유난히 조용해 보였다. 지명길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노민지는 이미 휴대전화로 포털 검색과 SNS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강윤호 이름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아직 정보가 없습니다. 검색량이 올라가고 있어요.”

장천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명길이 물었다. “의원님. 정말 강윤호라는 분을 아십니까?”

장천길은 걸음을 멈췄다. 복도 창밖으로 국회 앞 잔디밭이 내려다보였다. 겨울 잔디는 누렇게 죽어 있었고, 그 위로 까마귀 몇 마리가 천천히 걸어 다녔다.

“알지.”

그 한마디에 지명길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어떤 분입니까?”

“내가 한때 가장 닮고 싶어 했던 사람.”

장천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그러나 그 건조함이 오히려 오래된 상처처럼 들렸다.

“그리고 내가 평생,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한 사람.”

노민지의 손가락이 휴대전화 화면 위에서 멈췄다. 그녀도 처음 듣는 말인 듯했다.


의원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또 다른 봉투가 놓여 있었다. 이번에는 갈색 서류봉투가 아니라 흰색 우편봉투였다. 받는 사람 이름도, 보낸 사람 이름도 없었다. 문 앞을 지키던 인턴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놓인 것 같다고 했다. 지명길은 장갑을 끼고 봉투를 집어 들었다. 봉투는 얇았다. 안에는 사진 한 장과 작은 종이 조각 하나가 들어 있었다.

사진은 오래된 여권 사진처럼 보였다. 젊은 남자의 얼굴. 선이 굵고 눈빛이 강했다. 뒷면에는 푸른 잉크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강윤호.


그리고 작은 종이 조각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변절자는 돌아온 사람이 아니라, 돌아오지 않은 사람을 팔아 살아남은 사람이다.


회의실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지명길은 종이를 내려놓지 못했고, 노민지는 처음으로 표정 관리에 실패했다. 장천길은 사진을 받아 들었다. 그의 손은 거의 떨리지 않았지만, 지명길은 보았다. 엄지손가락이 사진 가장자리를 너무 세게 누르고 있었다.



“의원님.” 노민지가 낮게 말했다. “이건 지금 당장 경찰에 넘겨야 합니다.”

“아니.” 장천길이 말했다.

“안 됩니다. 이건 명백한 협박입니다. 여기서 덮으면 더 위험해집니다.”

장천길은 사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경찰에 넘기면 누가 먼저 볼까.”

노민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은 너무 현실적이었다. 경찰에 넘긴 자료가 수사팀으로 가기 전에 어느 기자에게 흘러갈지, 어느 정치인의 손에 들어갈지, 어느 방송 패널의 입으로 먼저 나올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명길이 물었다.

장천길은 천천히 사진을 봉투 안에 다시 넣었다. “강윤호부터 찾아야지.”

“살아 있는지도 모른다면서요.”

“그래서 찾아야 한다.”

노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상대가 원하는 게 그겁니다. 의원님이 과거를 직접 뒤지게 만드는 것. 그 과정에서 어떤 기록이 나오든, 어떤 증언이 나오든, 그걸로 의원님을 묶으려는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거의 확실합니다.”

장천길은 그제야 노민지를 바라보았다. “확실하다는 말은 정보를 가진 사람이 쓰는 말이야. 민지 씨는 뭘 알고 있나.”

노민지의 얼굴이 굳었다. 지명길은 숨을 죽였다. 이 질문은 언젠가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노민지는 모든 것을 너무 빨리 파악했고, 너무 정확하게 위험을 예측했다. 선거 전략가로서의 능력이라 하기에는 어떤 순간엔 지나치게 정보가 앞서 있었다.

“저는 판을 읽는 겁니다.”

“누가 만든 판인지도?”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의원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비서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의원님, 배철중 국장 쪽에서 송민희 기자가 인터뷰 요청을 넣었습니다. 오늘 중으로 짧게라도 입장을 듣고 싶다고 합니다.”

송민희.

이름이 나오자 장천길은 짧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워싱턴에서 막 돌아온 기자. 출마 선언 날 자신을 묘하게 오래 바라보던 얼굴. 그리고 오늘 아침 자신을 겨냥한 질문의 흐름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읽고 있을 사람.

노민지가 곧바로 말했다. “거절하십시오. 지금은 어떤 인터뷰도 위험합니다.”

지명길은 반대로 말했다. “오히려 만나 봐야 합니다. 기자들이 다 같은 건 아닙니다.”

노민지가 차갑게 웃었다. “그 순진함이 부럽네요.”

“모두를 적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정치에서 기자는 적이거나, 아직 적이 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장천길은 두 사람을 가만히 보았다. 다시 두 보좌관의 세계가 충돌하고 있었다. 하나는 믿음으로 버티려 했고, 하나는 불신으로 살아남으려 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송민희 기자에게 전해. 오늘 밤 아홉 시. 의원회관 말고 밖에서 보자고.”

노민지가 눈썹을 찌푸렸다. “의원님.”

“공식 인터뷰가 아니야. 내가 그 기자를 보는 거지.”

“그 기자가 의원님을 보는 겁니다.”

“그렇겠지.”

장천길은 다시 강윤호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지금은 나도 누가 나를 보고 있는지 봐야겠어.”

그날 오후, ‘변절자’라는 단어는 더 이상 단순한 정치적 비난이 아니게 되었다. 여기에 강윤호라는 이름이 붙었고, 러시아 극동이라는 장소가 붙었으며, 백야라는 뜻 모를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대통민정당은 신중한 척하며 공세 수위를 높였고, 자유우국당은 장천길 개인 문제라며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참의당 쪽 논객들은 그를 두고 “한 시대의 운동권 엘리트가 어떻게 권력 엘리트로 재탄생하는지 보여 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각자의 말은 달랐지만, 결론은 비슷했다. 모두가 장천길을 설명하려 했고, 그 설명 속에서 장천길 자신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늦은 오후, 국회 기자실 한쪽에서는 송민희가 장천길 관련 기사를 읽고 있었다. 그녀의 수첩 안에는 여전히 워싱턴에서 받은 명함과 서울 카페에서 받은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장천길. 백야. 사슴눈. 장천길을 먼저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를 의심하게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보십시오.

그녀는 화면에 떠 있는 제목을 천천히 읽었다.

장천길, 변절 논란에 이어 1991년 실종 인물 연루 의혹

민희는 기사를 끝까지 읽지 않고 창을 닫았다. 기사에는 사실보다 빈칸이 많았다. 그러나 선거판에서 빈칸은 종종 사실보다 더 빨리 퍼진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모르는 자리에는 가장 자극적인 상상을 채워 넣는다. 누군가는 지금 그 빈칸을 만들고 있었다. 너무 정교하게. 너무 빠르게.

민희는 배철중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장천길 의원 측과 오늘 밤 접촉 예정입니다. 공식 인터뷰는 아닙니다.’

답장은 거의 바로 왔다.

‘녹음 켜. 감정 섞지 말고. 이건 커진다.’

민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배철중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 이건 커진다. 그것은 예측이라기보다 기대처럼 읽혔다. 언론은 사건이 커질수록 바빠지고, 바빠질수록 더 많은 것을 놓친다. 혹은 일부러 놓친다.

그 시각, 국회 지하 주차장에서는 회색 패딩을 입은 남자가 천천히 차에 올라탔다. 그는 오전에 장천길에게 강윤호의 이름을 던진 바로 그 남자였다. 차 안에는 운전자가 없었다. 남자는 조수석에 앉아 휴대전화를 꺼냈다.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통화가 연결되자 그는 짧게 말했다.

“이름은 던졌습니다. 반응했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진은?”

“도착했을 겁니다.”

“장천길이 움직일까요?”

남자는 백미러를 통해 뒤쪽을 살폈다. 지하 주차장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을 푸르게 비췄다.

“움직일 겁니다. 강윤호 이름엔 아직도 반응합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만족한 듯했다.

“좋습니다. 변절자라는 말은 오래 못 갑니다. 하지만 죄책감은 오래갑니다. 우리는 그 죄책감을 따라가면 됩니다.”

통화가 끊겼다. 남자는 휴대전화를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한동안 차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승리감도, 불안도 없었다. 누군가의 지시를 완수한 사람 특유의 무표정만 있었다.

국회 건물 밖으로 저녁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불이 켜진 창문들은 하나둘 더 밝아졌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누군가를 공격하거나 방어하거나 팔아넘길 문장을 만들고 있었다. 장천길의 이름은 이미 뉴스가 되었고, 강윤호의 이름은 곧 검색어가 될 것이며, 백야라는 단어는 아직 어둠 속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어둠 속에 남아 있는 단어일수록, 한번 빛을 받으면 더 깊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