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2부 가짜 평화 (22화)

 

제2부 가짜 평화

제1장 승자의 고립

제2절 손을 내미는 적


   자유우국당 중앙당사 8층에는 축하 화환보다 더 오래 남는 냄새가 있었다. 갓 갈아 끼운 카펫의 먼지 냄새, 복도 끝 흡연실에서 새어 나온 담배 냄새, 회의실마다 식어 가는 커피 냄새, 그리고 사람들의 속내가 말보다 먼저 마르는 냄새. 총선이 끝난 지 사흘이 지났지만 당사는 아직 정리가 덜 된 선거본부 같았다. 벽에는 지역별 당선자 명단이 붙어 있었고, 낙선한 후보들의 이름 옆에는 누군가 빨간펜으로 작게 표시를 해 두었다. 승리한 사람들은 더 높은 방으로 올라갈 길을 찾았고, 패배한 사람들은 누가 자신의 이름을 지웠는지 찾고 있었다.

장천길은 8층 회의실 앞 복도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안쪽에서는 웃음소리가 났다. 승자들이 서로를 축하하는 소리였다. 그러나 그 웃음은 넓게 퍼지지 못하고 문틈 안쪽에서만 돌았다. 장천길은 초대받은 사람처럼 그 앞에 서 있었지만, 실제로는 초대받지 못한 사람에 가까웠다. 그가 참석할 회의는 당선자 간담회가 아니라, 그보다 한 시간 뒤 예정된 ‘선거 평가 소위원회’였다. 말이 소위원회였지, 사실상 당 지도부가 문제 인물들을 불러 앞으로의 태도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노민지는 장천길의 오른쪽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회색 정장 위에 검은 코트를 걸친 그녀는 전날 밤부터 거의 잠을 자지 않은 사람답지 않게 말끔했다. 입술 색은 옅었고, 눈가에는 피로가 남아 있었지만 표정만은 다듬어진 유리처럼 차가웠다. 지명길은 반대편에 서서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의원실 단체대화방에는 아직도 지지자들의 축하 메시지와 항의 메시지가 섞여 들어오고 있었다. 축하와 비난이 한 화면에서 서로를 밀어냈고, 둘 중 어느 쪽도 완전히 진짜 같지 않았다.

“의원님.” 노민지가 낮게 말했다. “오늘은 먼저 화내시면 안 됩니다.”

장천길이 그녀를 보았다. “내가 그렇게 자주 화를 냈나?”

“자주 내지는 않으시죠. 그런데 화를 내실 때는 상대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십니다.”

지명길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끼어들었다. “안에서 먼저 긁을 겁니다. 후원회, 강윤호, 동부선, 다 꺼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도윤은?” 장천길이 물었다.

노민지는 즉시 답했다. “들어와 있습니다. 간담회가 아니라 지도부 회의 쪽에요. 실무 평가라고 해 놓고 실제론 당권 정리 회의겠죠.”

장천길은 복도 끝 창문 쪽을 바라보았다. 당사 맞은편 빌딩 유리창에 자유우국당 로고가 희미하게 비쳤다. 푸른색과 흰색이 섞인 상징은 선명했지만, 유리 안에 반사된 사람들의 얼굴은 모두 어둡게 번졌다. 그는 그 반사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잠시 찾았다. 당선자라기보다 피고인 같았다. 총선에서 살아남은 사람에게 당은 축하가 아니라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젊은 당직자가 고개를 내밀었다. “장 의원님,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 안에는 열두 명이 앉아 있었다. 지도부 세 명, 전략기획본부 사람 둘, 선거대책위원회 잔류 인원들, 그리고 한도윤. 한도윤은 회의 테이블 오른쪽 끝에서 세 번째 자리, 당내 원로위원 두 명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짙은 감색 양복, 지나치게 단정한 넥타이, 입가에 걸린 얕은 미소. 그는 장천길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손바닥을 살짝 들어 보였다. 축하인지 조롱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인사였다.

“장 의원, 늦게라도 축하드립니다.”

장천길은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늦은 축하는 오래 기억되는 법이지요.”

한도윤의 미소가 조금 더 얇아졌다. “오해는 마십시오. 선거가 워낙 정신없었으니까요.”

회의는 형식상 선거 평가로 시작됐다. 수도권에서 자유우국당이 잃은 의석, 대통민정당이 흡수한 중도층, 참의당 후보들이 야권 단일화 없이도 프레임을 흔든 지역, 국민개혁연합의 애매한 존재감, 세대별 투표율, 부동층 이탈. 숫자가 이어졌고, 그래프가 넘어갔고, 누군가는 펜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러나 장천길은 그 모든 수치가 결국 한 문장을 향해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누가 책임질 것인가.

전략기획본부장이 프레젠테이션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결론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우리 당은 전체적으로 방어에는 성공했지만, 수도권 중도층에 대한 확장성에 한계를 보였습니다. 특히 후보 개인 리스크가 프레임화된 지역에서 이탈 폭이 컸습니다.”

그는 일부러 장천길을 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노골적이었다.

장천길이 물었다. “후보 개인 리스크라는 표현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회의실 공기가 잠시 굳었다.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예상보다 빨리 나왔기 때문이었다. 한도윤이 느긋하게 물컵을 들어 올렸다.

전략기획본부장은 마른기침을 했다. “특정인을 지목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장 의원님 지역구에서도 선거 막판에 과거 행적과 후원회 관련 이슈가 집중적으로 부각됐고, 그 결과 당 전체 이미지에도 부담이 있었다는 평가가…”

“제가 살아남은 게 부담이었다는 뜻입니까?”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죽었으면 부담이 줄었겠습니까?”

노민지가 테이블 아래에서 아주 작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그러나 장천길은 말을 거두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 방에서 이미 재판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피고인이 침묵하면 판결문만 길어진다.

한도윤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 “장 의원, 너무 예민하게 받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동지를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다음 판을 준비하자는 겁니다.”

“다음 판이라.” 장천길이 그를 보았다. “그 판에 제 자리는 있습니까?”

한도윤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정확한 대답이었다.

회의는 한 시간 넘게 이어졌고, 끝날 때쯤에는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치 회의에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대개 가장 중요한 결정이 이미 밖에서 내려졌다는 뜻이었다. 지도부는 공식적으로 장천길의 당선과 지역구 사수 공로를 인정한다고 했다. 동시에 후원회 의혹과 과거 행적 논란에 대해서는 본인이 책임 있게 해명해야 한다고 했다. 당은 장천길을 버리지는 않았다. 다만 그를 끌어안지도 않았다.

회의가 끝나자 한도윤이 먼저 일어나 장천길 쪽으로 걸어왔다. 주변 사람들은 마치 우연인 것처럼 서류를 챙기며 둘 사이의 거리를 비워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만남이 즉흥적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잠깐 차 한잔하시겠습니까?” 한도윤이 말했다.

장천길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회의실 커피면 충분히 마셨습니다.”

“당사 커피 말고요. 밖에서.”

노민지가 한도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명길은 바로 대답하려 했지만, 장천길이 손을 들어 막았다.

“언제입니까?”

“지금.”

한도윤의 차는 당사 지하 주차장 가장 안쪽에 대기하고 있었다. 검은색 대형 세단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사람은 경호원처럼 보였지만, 장천길은 그가 단순한 수행기사만은 아니라고 느꼈다. 눈은 전방을 보고 있었지만 귀는 뒤쪽에 열려 있었다. 노민지는 함께 타려 했으나 한도윤이 부드럽게 막았다.

“둘이서만 잠깐 이야기하죠. 보좌진이 들으면 서로 피곤해지는 얘기도 있으니까.”

지명길의 얼굴이 굳었다. “의원님, 일정상…”

장천길은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멀리 안 가겠지요.”

한도윤은 미소를 지었다. “멀리 갈수록 말이 많아지는 법이니까요. 가까운 데로 갑니다.”

차는 여의도를 벗어나지 않았다. 국회 뒤편 골목을 지나 오래된 일식집 앞에 멈췄다. 낮 영업 시간이 시작되기 전이라 간판에는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았고, 출입문 옆 작은 화분들은 겨울을 지나느라 잎끝이 갈색으로 말라 있었다. 안쪽 별실에는 이미 차와 마른 과일이 놓여 있었다. 예약은 오래전에 된 듯했다.

장천길은 방 안에 들어서자마자 문 옆 벽을 한 번, 천장을 한 번 보았다. 한도윤이 그 시선을 보고 웃었다.

“녹음 걱정하십니까?”

“정치인이 둘만 만나는데 녹음 걱정을 안 하면 그게 더 이상하지요.”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먼저 말하죠. 저는 오늘 이 대화를 녹음하지 않습니다.”

“그 말도 녹음됐으면 좋았을 텐데요.”

한도윤은 웃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둘은 마주 앉았다. 문이 닫히자 바깥 복도 소리가 멀어졌다. 장천길은 차를 마시지 않았다. 한도윤은 찻잔을 들어 향만 맡고 내려놓았다.

“장 의원님.” 그가 처음으로 존칭을 바꿨다. 회의실에서는 ‘장 의원’이었고, 지금은 ‘장 의원님’이었다. 사람을 밀어낼 때와 끌어들일 때 쓰는 말이 다르다는 것을 한도윤은 잘 알고 있었다. “우리 둘이 싸워서 이득 보는 사람이 누굽니까?”

“질문이 너무 넓군요.”

“대통민정당?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싸우면 좋아하지만, 판을 설계할 능력은 부족해요. 참의당? 아닙니다. 그쪽은 우리 싸움을 도덕 문제로 포장할 뿐이죠. 언론? 그들은 불이 나면 사진을 찍지만, 대개 불을 직접 붙이진 않습니다.”

장천길은 그를 가만히 보았다. “그럼 누가 붙였습니까?”

한도윤은 대답 대신 서류 봉투 하나를 꺼냈다. 봉투에는 아무 표식도 없었다. 그는 그것을 테이블 위로 밀었다.

“장 의원님을 겨냥한 후원회 의혹, 과거 러시아 기록, 강윤호라는 이름, 동부선이라는 표현. 이 네 가지가 동시에 나온 건 우연이 아닙니다.”

“그걸 이제야 알았습니까?”

“저도 표적이었거든요.”

장천길의 눈동자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한도윤은 그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놀라실 필요 없습니다. 선거판에서 서로를 공격하는 건 일상입니다. 하지만 이번 건은 다릅니다. 저는 장 의원님이 쓰러지면 제가 올라갈 거라 생각한 사람들 중 하나였을지 모르죠. 솔직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저와 의원님이 모두 다친 상태로 살아남기를 원했습니다.”

장천길은 봉투를 열지 않았다. “상처 입은 채 살아남은 사람은 협상하기 쉽다.”

한도윤의 눈빛이 잠깐 굳었다. “그 표현을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쪽도 들은 모양이군요.”

이번에는 한도윤이 차를 마셨다. 뜨거운 차가 목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그의 표정은 다시 정리되었다.

“그 표현은 요즘 몇몇 외교 라인에서 돕니다. 정확히 누가 처음 썼는지는 모릅니다. 다만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은 한국 정치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협상 가능한 자산으로 봅니다.”

“그럼 당신은 나를 사람으로 봅니까, 자산으로 봅니까?”

“동맹으로 봅니다.”

그 말은 너무 매끄러워서 오히려 거칠게 들렸다. 장천길은 천천히 웃었다.

“한 의원, 우리 사이에 동맹이라는 말이 어울립니까?”

“적이라는 말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적은 등을 보이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지요.”

한도윤은 잠시 말문을 닫았다. 그 침묵 속에서 식당 복도의 발소리가 멀리 지나갔다. 장천길은 그제야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세 장의 출력물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는 선거 막판 장천길 관련 부정 키워드가 확산된 시간표였다. 두 번째는 청해데이터랩과 몇몇 여론조사 하청 업체의 연결 도식이었다. 세 번째는 한도윤 캠프 주변 자문그룹과 한중문화교류재단의 접촉 기록이었다.

세 번째 장을 본 순간 장천길은 한도윤을 다시 보았다.

“이걸 왜 나에게 줍니까?”

“제가 갖고 있으면 협박 자료고, 의원님이 갖고 있으면 공동 방어 자료입니다.”

“혹은 나를 함께 묶는 족쇄가 될 수도 있겠지요.”

“정치는 원래 족쇄와 밧줄을 구분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장천길은 서류를 내려놓았다. 한도윤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동북아평화경제포럼 초청장 받으셨지요?”

그 질문은 예상된 듯하면서도 갑작스러웠다. 장천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도 받았습니다.” 한도윤이 말했다. “대통민정당 쪽에서도 셋, 참의당 쪽에서도 하나, 국민개혁연합 쪽에서도 둘. 이름은 다르지만 같은 테이블입니다. 베이징에서 비공개 라운드테이블을 연답니다. 주제는 동북아 평화와 공급망 안정. 듣기 좋죠.”

“그쪽이 가자고 합니까?”

“가야 합니다.”

장천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방금 공동 방어를 말하던 사람이, 이제는 위험한 테이블에 함께 앉자고 하는군요.”

“위험한 테이블은 우리가 안 가도 열립니다. 문제는 누가 거기서 우리 이름으로 말하느냐입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장천길은 그 점이 불쾌했다. 정치판에서 가장 위험한 제안은 거짓말로 포장된 제안이 아니다. 절반쯤 맞는 말로 시작하는 제안이다. 한도윤의 말은 그랬다. 베이징의 테이블은 피한다고 사라질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한국 정치의 다음 흐름을 이야기할 것이고, 장천길이 없으면 장천길의 이름을 빌려 다른 사람이 말할 수도 있었다.

“누가 주최합니까?”

“공식으론 동북아평화경제포럼. 실무는 청해전략연구소와 화평아시아재단. 뒤에는…”

한도윤은 말을 멈췄다.

“해연망?” 장천길이 낮게 물었다.

한도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완전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 안의 온도가 한순간 떨어진 듯했다.

“그 이름도 아십니까?”

장천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그 이름을 완전히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이철규가 붙인 임시 코드명을 그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다만 지명길이 USB에서 본 자료의 일부, 노민지의 반응, 송민희가 던진 질문들, 그리고 익명의 전화들이 하나의 방향을 만들고 있었다. 장천길은 정치인이었다. 정보의 전체를 갖지 못해도, 사람들이 어떤 단어 앞에서 숨을 멈추는지는 볼 줄 알았다.

한도윤은 아주 천천히 봉투를 다시 접었다. “그 이름은 공식 기록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그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 늘고 있군요. 그 자체가 위험합니다.”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

“제 편입니다.”

솔직한 답이었다. 그래서 더 믿기 어려웠다.

“그 제 편 안에 나라가 들어 있습니까?” 장천길이 물었다.

한도윤은 잠시 장천길을 똑바로 보았다. “정치인들이 나라를 말할 때, 대개 자기 자리가 먼저 들어 있습니다. 장 의원님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서로 거룩한 척하지 않으면 말이 통하니까.”

장천길은 찻잔을 손끝으로 돌렸다. 차는 이미 식어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여러 장면이 겹쳤다. 워싱턴에서 송민희에게 흘러갔을 세 단어. 의원실 문틈으로 들어온 검은 USB. 노민지가 숨긴 연락. 지명길의 불안한 눈빛. 폐인쇄소에서 죽은 박도윤. 그리고 방금 한도윤이 내민 봉투.

손을 내민 자는 적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더 위험한 것은 손을 내밀지 않는 적이었다. 보이지 않는 자들은 이미 그들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었다.

“조건이 있습니까?” 장천길이 물었다.

한도윤은 기다렸다는 듯 곧장 말했다. “첫째, 후원회 의혹에 대해 당 차원의 공동 대응 라인을 만듭니다. 의원님 혼자 해명하지 마십시오. 혼자 해명하면 혼자 의심받습니다.”

“둘째는?”

“베이징 포럼에 함께 갑니다. 공식 일정으로 만들지 않고, 경제 외교 자문 성격으로 처리합니다.”

“셋째는?”

한도윤은 이 대목에서 처음으로 약간 망설였다. “강윤호 이름을 당분간 더 이상 꺼내지 마십시오.”

장천길의 손가락이 멈췄다.

“왜죠?”

“그 이름은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에게 유리합니다.”

“강윤호가 죽었다는 뜻입니까?”

한도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살아 있다는 뜻입니까?”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대답보다 더 많은 방향을 열었다. 장천길은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한 의원. 당신은 강윤호를 압니까?”

한도윤은 마른 입술을 한 번 적셨다. 그 짧은 동작만으로도 장천길은 충분히 보았다. 한도윤은 강윤호를 알고 있었다. 직접 본 적이 있는지, 파일로만 봤는지, 누군가에게 들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그 이름 앞에서 준비된 사람이 아니었다.

“저는 이름만 압니다.”

“정치인은 모르는 이름 앞에서 그렇게 오래 침묵하지 않습니다.”

한도윤의 표정이 흐릿해졌다. 그는 밖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별실의 창은 작고 높았고, 바깥 풍경이라곤 맞은편 건물의 벽돌 일부뿐이었다.

“장 의원님. 강윤호가 정말 살아 있다면, 그는 당신 편이 아닐 겁니다.”

그 말은 협박이라기보다 경고처럼 들렸다. 그래서 장천길은 더 불편했다.

“누구 편입니까?”

“자기 편이겠죠. 오래 사라져 있던 사람들은 대개 그렇습니다.”

그때 장천길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화면에는 지명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장천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노민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 의원님, 지금 어디십니까? 지명길 보좌관이 USB 원본을 들고 사라졌습니다.

장천길은 메시지를 읽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한도윤이 그의 얼굴을 살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늘 생기죠.”

“지금 생긴 문제입니까, 오래전에 생긴 문제입니까?”

장천길은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정치에서 그 둘이 구분되던가요?”

식당을 나왔을 때 하늘은 흐려져 있었다. 여의도의 낮은 빌딩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길가의 현수막들이 무기력하게 흔들렸다. 한도윤은 차에 오르기 전 장천길에게 손을 내밀었다. 공식 사진 촬영도 없고, 기자도 없고, 당직자도 없는 자리였다. 그래서 그 악수는 더 위험했다.


 장천길은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적의 손은 대개 차갑지 않다. 오히려 따뜻하고, 단단하고,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을 갖고 있다. 그는 그 손을 잡았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은 순간, 골목 건너편 카페 2층 창가에서 셔터 소리가 아주 작게 울렸다. 사진을 찍은 남자는 카메라를 내리고 노트북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에는 방금 찍힌 장천길과 한도윤의 악수 장면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남자는 파일 이름을 입력했다.


JCG-HDY_contact_01.jpg


그는 곧바로 사진을 암호화된 메신저 창에 첨부했다. 수신자 이름은 없었다. 다만 채팅방 제목만 남아 있었다.


Blue Table.


사진이 전송되자마자 답장이 왔다.


Good. Let them believe they chose each other.


남자는 노트북을 닫았다. 카페 안에서는 평범한 점심시간의 소음이 흘렀다. 커피머신이 울렸고, 학생 둘이 웃었고, 회사원 하나가 영수증을 구겨 주머니에 넣었다. 아무도 창가의 남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빈 잔을 그대로 둔 채 계단을 내려갔다.

한편 당사로 돌아온 장천길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노민지와 마주쳤다. 그녀는 화가 난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차분했다. 그런 얼굴은 대개 감정을 이미 계산으로 바꾼 뒤의 얼굴이었다.

“지명길은?” 장천길이 물었다.

“의원회관에서 나간 뒤 연락이 안 됩니다. 휴대전화는 꺼져 있고요.”

“USB는?”

“사라졌습니다.”

장천길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 아이가 혼자 움직였군.”

“혼자라고 보십니까?”

노민지의 질문에는 날이 있었다. 장천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와 움직인다고 보나?”

“그걸 지금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지명길은 의원님을 배신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럼?”

노민지는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의원님이 더 이상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되기 전에, 자기가 먼저 더러운 쪽을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 말은 지명길을 두둔하는 말이었지만, 동시에 장천길을 향한 비난이기도 했다. 장천길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날 오후 늦게, 송민희에게도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발신자는 알 수 없었다. 사진 속에는 오래된 일식집 앞에서 악수하는 장천길과 한도윤이 찍혀 있었다. 사진만 보면 두 사람은 비밀 동맹을 맺은 것처럼 보였다. 민희는 한참 동안 사진을 바라보다가, 파일 속성을 열었다. 생성 시각은 실제 촬영 시각보다 9분 앞서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화면에 손을 얹은 채 중얼거렸다.

“누가 사진을 찍기 전에 이미 사진을 만들었지?”

그 순간 메일이 하나 더 도착했다. 제목은 없었다. 본문도 짧았다.

손을 내민 사람을 보지 마십시오.

그 손을 잡게 만든 사람을 보십시오.

첨부파일 이름은 단 하나였다.


BLUE_TABLE_guestlist.xlsx


송민희는 파일을 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들어 장천길 의원실 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세 번 울렸다. 네 번째 연결음이 울리기 직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지명길도, 노민지도, 장천길도 아니었다.

낮고 거친 남자 목소리가 말했다.

“송 기자님. 지금 그 파일을 여시면 두 번째 사람이 죽습니다.”

통화는 곧바로 끊겼다.

민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사무실 밖에서는 편집국의 평범한 소음이 들렸다. 키보드 소리, 전화벨, 누군가 웃으며 욕하는 소리, 속보 자막이 바뀌는 소리. 세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계속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확실히 느꼈다. 제1부에서 그녀에게 던져졌던 세 단어가 이제 하나의 테이블 위로 모이고 있었다.


장천길.

백야.

사슴눈.


그리고 이제 그 테이블에는 새로운 이름이 놓였다.


Blue Table.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