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1부 조용한 침투 (10화)

 제1부 조용한 침투

제5장 회색 자금

제2절 노민지의 접촉


노민지는 지명길이 회계 파일을 처음 열어 본 시각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장천길 의원실 안쪽, 창가 옆 회의용 컴퓨터에 접속 기록 알림이 떴고, 그 알림은 그녀의 업무용 태블릿에도 동시에 연동되었다. 새벽 6시 12분. 지명길 보좌관. 후원회 1차 원장 파일 접근. 이어서 6시 19분. 후원자 세부 명단 파일 접근. 6시 31분. 청해전략연구소 지출 내역 파일 접근.

알림은 건조했다. 누가 언제 어떤 문서를 열었는지 알려 줄 뿐이었다. 그러나 노민지에게 그런 기록은 문장보다 더 많은 말을 했다. 사람은 말을 꾸밀 수 있지만, 접속 시간은 꾸미기 어렵다. 지명길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명길은 의심을 시작하면 끝까지 가는 사람이었다.

노민지는 의원회관 복도 끝 작은 탕비실에 서서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종이컵 가장자리에 립스틱 자국이 흐릿하게 남았다. 그녀는 그 자국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웠다. 누군가에게 흔적을 남기는 일은 정치에서 가장 어리석은 습관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흔적을 남겼다. 돈의 흐름에, 전화의 시간에, 표정의 미세한 흔들림에, 설명이 과하게 길어지는 순간에.

지명길은 좋은 사람이었다. 그게 문제였다. 좋은 사람은 이상한 것을 보면 바로잡으려 한다. 하지만 정치판에서 이상한 것들은 대개 잘못 놓인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 일부러 그 자리에 놓아둔 덫이었다. 덫을 발견했다고 해서 손으로 집어 들면 안 된다. 먼저 누가 덫을 놓았는지, 그리고 누가 그 덫을 발견하기를 기다리는지 보아야 한다.

노민지는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순간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떠 있었다. 그러나 번호 끝 네 자리만으로도 그녀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7719. 베이징에서 처음 받은 번호였다. 그 번호는 몇 년 동안 여러 번 바뀌었지만, 끝 네 자리는 늘 같았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에는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에는 서명이라고 깨달았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복도 너머 장천길 의원실 문이 열리며 지명길이 나왔다. 그는 손에 두꺼운 출력물을 들고 있었다. 눈 밑에는 잠을 못 잔 사람 특유의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고, 입술은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노민지는 그가 자신을 보자마자 한 박자 늦게 걸음을 멈추는 것을 보았다. 그 짧은 정지가 모든 것을 말해 주었다. 지명길은 이미 그녀를 의심하고 있었다.

“일찍 나오셨네요.” 노민지가 먼저 말했다.

“노 보좌관님도요.”

“선거 때는 다들 일찍 나오죠.”

“새벽 여섯 시부터 후원회 파일 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노민지는 미소를 지었다. “제가 봤다는 말인가요?”

“아뇨. 제가 봤습니다.”

지명길은 출력물 한 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표에는 후원자 이름, 입금 시간, 금액, 결제 경로, 이메일 주소 일부가 정리되어 있었다. 빨간색 형광펜이 군데군데 그어져 있었다. 노민지는 그 표시들을 훑어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는 예상보다 빨랐다. 그리고 예상보다 정확했다.



“이거 이상합니다.” 지명길이 말했다.

“뭐가요?”

“소액 후원자들이 새벽 시간대에 일정 간격으로 들어왔습니다. 4만 원, 7만 원, 9만 원. 금액은 다 다른데 패턴은 같습니다. 이메일 생성 규칙도 비슷하고, 일부 주소는 존재하지 않는 빌딩으로 나옵니다. 그리고 여기.”

그는 손가락으로 하단 지출 내역을 가리켰다.

“청해전략연구소. 우리 캠프 자문 계약 명단에 이 업체가 왜 들어가 있습니까?”

노민지는 일부러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때로 상대를 더 많이 말하게 만든다.

지명길은 기다리지 못하고 말을 이었다. “계약서는 있는데, 자문 보고서가 없습니다. 세금계산서도 애매하고요. 그런데 이 업체 대표가 한중문화교류재단 세미나에 세 번이나 참석했습니다. 어제 과장님이 말한 그 재단이요. 이것도 우연입니까?”

“명길 씨.”

노민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무실에서 그녀가 누군가를 이름으로 부르는 일은 많지 않았다. 직함을 부를 때보다 이름을 부를 때, 사람들은 조금 더 감정적으로 반응한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 자료를 누구한테 보여줬어요?”

“아직 아무에게도요.”

“의원님께도?”

“보고드릴 겁니다.”

“지금은 안 돼요.”

지명길의 표정이 굳었다. “왜 안 됩니까?”

“이게 진짜인지 먼저 봐야 하니까요.”

“파일은 의원실 서버에 있었습니다.”

“의원실 서버에 있다고 다 진짜는 아니에요.”

그 말은 지명길에게 모욕처럼 들린 모양이었다. 그는 출력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종이가 살짝 구겨졌다.

“그러면 누가 우리 서버에 가짜 자료를 넣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도 있죠.”

“그게 가능합니까?”

노민지는 대답 대신 복도 끝 CCTV를 힐끗 보았다. 지명길도 그 시선을 따라가다 입을 다물었다. 의원회관 복도에는 언제나 눈이 있었다. 카메라, 기자, 다른 의원실 직원, 청소 노동자, 우연히 지나가는 보좌관. 정치판에서 완전히 사적인 대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회의실로 가죠.”

작은 회의실 문이 닫히자 노민지는 블라인드를 내렸다. 방 안에는 선거구 지도, 여론조사 그래프, 지역 행사 일정표가 벽마다 붙어 있었다. 표와 숫자들은 차갑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그 숫자 뒤에 숨어 있는 사람들의 욕망은 결코 차갑지 않았다.

지명길은 그녀가 입을 열기 전 먼저 말했다.

“노 보좌관님,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청해전략연구소 압니까?”

“알아요.”

“리정후라는 사람도 압니까?”

노민지의 눈동자가 아주 짧게 흔들렸다. 지명길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아시는군요.”

“정치권에 있는 사람이 한중 경제 행사에 나온 사람 몇 명 안다고 해서 범죄자는 아니에요.”

“제가 범죄자라고 했습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은 표정이잖아요.”

지명길은 잠시 말을 삼켰다. 그가 화를 참고 있다는 걸 노민지는 알았다. 그는 의원실에서 흔치 않은 종류의 사람이었다. 출세를 위해 온 것도 아니고, 돈을 벌기 위해 온 것도 아니며, 장천길이라는 정치인의 가능성을 믿고 온 사람. 그런 사람은 강하다. 그러나 동시에 쉽게 부러진다. 세상이 자신이 믿는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믿음이 크면 클수록 균열도 깊어진다.

“저는 의원님을 지키고 싶습니다.” 지명길이 낮게 말했다.

“저도 그래요.”

“정말입니까?”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은 단순한 확인이 아니었다. 지명길은 그녀가 장천길을 지키는지, 아니면 장천길이라는 정치적 자산을 관리하는지 묻고 있었다. 노민지는 자신도 그 답을 명확히 알지 못했다.

“명길 씨는 의원님을 사람으로 믿죠.”

“그게 잘못입니까?”

“아뇨. 하지만 저는 의원님을 정치인으로 봐요. 정치인은 사람으로만 지키면 못 지켜요.”

“그래서 위험한 사람들하고 손잡습니까?”

“손잡은 적 없어요.”

“그럼 접촉은 했습니까?”

방 안이 조용해졌다. 바깥 복도에서 누군가 웃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노민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국회 건물 너머로 겨울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정치에서 접촉은 호흡 같은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숨 쉰다고 다 오염되는 건 아니죠.”

“독가스를 마시면 죽습니다.”

지명길의 대답은 곧았다. 노민지는 그 곧음이 부러우면서도 답답했다. 세상은 곧은 사람에게 길을 내주지 않는다. 길을 찾으려면 때로 벽을 만지고, 때로 진흙을 밟고, 때로 더러운 손과도 악수해야 한다. 그녀는 그렇게 배웠다. 아니, 그렇게 배워야만 살아남았다.

그녀는 출력물을 다시 지명길에게 밀어 주었다.

“이 자료, 의원님께 바로 올리지 마요. 제가 오늘 안으로 청해전략연구소 쪽 확인해 볼게요.”

“그 확인을 왜 노 보좌관님이 합니까?”

“내가 아는 라인이 있으니까요.”

“그 라인이 문제일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내가 확인해야 해요.”

지명길은 그녀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불신이 있었고, 동시에 실망이 있었다. 노민지는 불신보다 실망이 더 아팠다. 불신은 정치의 일부지만, 실망은 아직 인간관계가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제가 이 자료를 복사해 두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으시겠죠.”

“그 정도는 했겠죠.”

“오늘 밤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지명길은 출력물을 챙겨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노민지는 혼자 남은 회의실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천천히 휴대전화를 꺼냈다. 7719 번호로 짧은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20:30. 종로. 같은 자리.’

노민지는 화면을 오래 보았다. 답장을 보내지 않았는데, 다시 메시지가 들어왔다.

‘청해 문제는 더 늦기 전에 정리해야 합니다.’

그녀는 이번에도 답하지 않았다. 대신 연락처 목록에서 다른 이름을 찾았다. 저장명은 ‘도서관’이었다. 실제 도서관은 아니었다. 그녀가 베이징 유학 시절부터 쓰던 은어였다. 상대는 동북아 정책 연구자이자 민간 외교 네트워크의 중간 연결자였다. 그리고 지금은 청해전략연구소와 한중문화교류재단 사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전화를 걸기 전, 노민지는 자신의 얼굴을 회의실 유리창에 비친 모습으로 보았다. 말끔한 정장, 흐트러짐 없는 머리, 피곤해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눈. 그녀는 그런 얼굴을 만들기 위해 오래 연습했다. 여성 보좌관은 남성 보좌관보다 조금만 더 감정적이어도 가벼워 보였고, 조금만 더 냉정해도 독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노민지는 감정이 아니라 기능처럼 보이기로 했다. 필요한 말을 하고, 필요한 사람을 만나고, 필요한 순간에 침묵하는 사람.

전화는 세 번 울린 뒤 연결되었다.

“늦었네요.” 상대가 말했다. 리정후의 목소리였다. 부드럽고 낮았다. 한국어는 유창했지만 어딘가 끝음이 건조했다.

“연락하지 말라고 했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늘 그렇게 말하더군요.”

“이번엔 정말입니다. 당신 쪽 사람이 파일을 봤습니다.”

노민지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지명길이 파일을 본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리정후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의원실 내부 알림보다 더 빠른 감시망이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었다.

“당신들이 어떻게 알았죠?”

“당신들이 먼저 우리를 불렀으니까요.”

“우리가?”

“청해전략연구소 계약서에 접근한 순간, 연결된 쪽에도 흔적이 남습니다. 그 정도는 예상했어야죠.”

노민지는 이를 악물었다. “청해는 누가 넣었습니까?”

리정후는 잠시 웃었다. “만나서 이야기하시죠. 전화로 할 말은 아닙니다.”

“나는 당신들하고 만날 이유가 없습니다.”

“있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장천길 의원이 아직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요.”

노민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그 침묵은 이미 답이었다.

밤 8시 17분, 종로의 오래된 한정식집 골목은 낮과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낮에는 관광객과 회사원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였지만, 밤이 되자 간판의 빛은 낮아지고 문들은 안쪽으로 깊어졌다. 오래된 건물들 사이에는 새로 지은 유리벽 라운지가 끼어 있었고, 낡은 돌담 뒤편에는 예약자만 들어갈 수 있는 방들이 숨겨져 있었다. 서울에는 그런 공간이 많았다. 누구나 지나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 정치와 돈과 정보는 대개 그런 문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오갔다.



노민지는 택시에서 내려 주변을 한 번 살폈다. 뒤따라오는 차는 없었다. 적어도 눈에 띄는 차는 없었다. 그녀는 골목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청운재’라고 적힌 작은 현판 아래로 직원이 문을 열었다. 노민지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직원도 묻지 않았다. 이미 이야기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안쪽 방에는 리정후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짙은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고,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오십대 초반처럼 보였지만 실제 나이는 알기 어려웠다. 동북아 연구소 객원연구위원, 한중경제포럼 자문위원, 문화교류재단 이사. 그가 쓰는 직함들은 모두 민간인이었지만, 민간인이라는 말이 이 분야에서 얼마나 넓은 가면인지 노민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어서지 않고 고개만 살짝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노 보좌관님.”

“오랜만이어야 할 사이가 아닌데요.”

“정치권에서 오래 보지 않았다는 말은 대개 서로 조심했다는 뜻이죠.”

노민지는 자리에 앉지 않고 방을 둘러보았다. 창은 없었고, 벽에는 수묵화 한 점이 걸려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차 두 잔과 흰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리정후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봉투를 보더니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현금 아닙니다.”

“농담할 기분 아닙니다.”

“그래서 더 차분하게 이야기해야죠.”

노민지는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는 지나치게 편했다. 이런 방의 의자들은 늘 그랬다. 상대를 오래 앉아 있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청해전략연구소는 누가 넣었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그 질문부터 하실 줄 알았습니다.”

“답하세요.”

리정후는 봉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청해는 껍데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우산에 가깝죠. 선거 컨설팅, 정책 보고서, 지역 여론 분석, 외교 세미나 자문. 이름은 바뀌지만 기능은 같습니다.”

“누가 우리 캠프 지출 목록에 그 우산을 씌웠냐고 물었습니다.”

“당신 쪽 사람입니다.”

노민지는 눈을 가늘게 떴다. “거짓말.”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당신은 지금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겁니다.”

리정후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장천길 의원실에는 선의로 움직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선의는 정치자금 장부를 망치기 좋습니다. 누군가는 도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누군가는 작은 외부 자문 계약 하나쯤은 별문제 아니라고 봤을 거고요. 그리고 누군가는 그걸 기다렸겠죠.”

“당신들입니까?”

“우리라고 부르는 대상이 너무 넓습니다.”

“해연망.”

리정후의 손이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놓쳤을 만큼 짧은 정지. 그러나 노민지는 그 한 박자를 보았다. 그녀는 ‘해연망’이라는 단어를 정확한 의미도 모른 채 던져 보았다. 이철규나 국정원이 붙인 코드명이라는 사실은 그녀가 알 리 없었다. 다만 지명길의 출력물 옆에 찍힌 이상한 내부 메모 조각, 송민희의 취재 메모를 통해 흘러나온 단어, 그리고 리정후의 반응을 떠보기 위한 미끼였다.

리정후는 곧 웃었다. “재미있는 말을 들으셨군요.”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저는 모르는 척하는 데 능하지 않습니다. 대신 아는 것을 모르는 것처럼 분류하는 데 익숙하죠.”

그는 봉투를 그녀 쪽으로 밀었다.

“열어 보시죠.”

노민지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얇은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표지는 없었다. 첫 장 상단에는 영어 제목이 적혀 있었다.

‘Candidate Vulnerability Assessment: J.C.G.’

장천길 취약성 평가 보고서. 작성 날짜는 두 달 전이었다. 노민지는 첫 장을 넘겼다. 장천길의 운동권 경력, 자유우국당 내 고립 정도, 대통민정당 외곽 논객의 공격 가능성, 참의당과 노동 이슈의 접점, 후원회 소액 패턴을 이용한 의혹 제기 시나리오, 그리고 강윤호라는 이름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보고서를 덮었다.

“이걸 왜 나한테 줍니까?”

“당신이 장천길 의원을 지키고 싶어 하니까요.”

“지키는 방법이 협박입니까?”

“경고입니다.”

리정후는 부드럽게 말했다. “이 보고서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닙니다.”

“믿으라고요?”

“믿지 않아도 됩니다. 확인하면 되니까요.”

“누가 만들었습니까?”

리정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노민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마치 어디까지 말해야 그녀가 무너지지 않고, 어디서부터 말해야 그녀가 움직일지 계산하는 듯했다.

“자유우국당 안쪽에서 시작됐습니다.”

노민지는 웃지 않았다. 놀라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치에서 가장 먼저 등에 칼을 꽂는 사람은 대개 가장 가까운 쪽에 있다. 적은 정면에서 공격하지만, 경쟁자는 뒤에서 밀어낸다.

“한도윤 쪽입니까?”

“이름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름이 중요하죠. 정치에서 이름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습니까?”

“때로는 구조가 이름보다 중요합니다.”

리정후는 보고서 두 번째 장을 펼쳐 특정 문단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상처 입은 생존자’라는 표현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wounded survivor. 노민지는 그 단어를 읽는 순간 알 수 없는 불쾌감을 느꼈다.

“이 표현, 누가 썼습니까?”

“그게 왜 중요합니까?”

“같은 말을 들은 사람이 있습니다.”

“워싱턴에서요?”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리정후가 자신이 말하지 않은 도시 이름을 꺼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다.

리정후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장천길 의원은 떨어뜨리기 아까운 사람입니다. 완전히 무너뜨리면 쓸모가 없죠. 적당히 상처 입고, 적당히 고립되고, 적당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정치인. 그런 사람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 가장 좋습니다.”

“당신들은 장 의원을 협상 대상으로 만들려는 겁니까?”

“저는 그런 말을 한 적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 보좌관님은 늘 듣고 싶은 만큼 듣는군요.”

노민지는 보고서를 가방에 넣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그대로 두었다. 그것은 거절의 표시이기도 했고, 아직 완전히 거절하지 않았다는 표시이기도 했다.

“내가 이걸 가져가면 당신들 자료를 받은 사람이 됩니다.”

“가져가지 않으면 누가 이걸 썼는지 모른 채 당하겠죠.”

“당신들은 늘 선택지를 둘로 줄입니다.”

“정치는 원래 그렇습니다. 셋 이상으로 보이는 선택지는 대부분 같은 방향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그때 노민지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지명길이었다.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곧 메시지가 떴다.

‘의원님께 보고드렸습니다. 노 보좌관님께서 설명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노민지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지명길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답다. 그리고 위험했다.

리정후가 물었다.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니요. 원래 있던 문제가 말을 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노민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고서는 두고 갑니다.”

“그럼 사본을 못 보실 텐데요.”

“필요한 건 봤습니다.”

“아직 가장 중요한 장을 안 보셨습니다.”

리정후는 마지막 장을 펼쳤다. 노민지는 나가려다 멈췄다. 마지막 장에는 사진 한 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오래된 흑백사진. 눈 덮인 항구, 낡은 외투를 입은 젊은 남자 셋, 그리고 그중 한 명 옆에 선 젊은 여자의 흐릿한 얼굴.

사진 아래에는 짧은 문구가 있었다.

‘Vladivostok, Winter 1991. Subject K.Y.H. / Contact N.M.J.?’

노민지는 숨을 멈췄다.

“이건 조작입니다.”

리정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1991년에 열 살이었습니다.”

“그래서 물음표가 붙어 있죠.”

“이딴 걸로 장난치지 마세요.”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에 감정이 섞였다. 리정후는 그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누군가 당신 이름을 과거 사진에 붙이고 있습니다. 장천길 의원 이름이 과거 작전 기록에 붙은 것처럼.”

노민지는 다시 사진을 보았다. 흐릿한 젊은 여자의 얼굴은 분명 자신일 리 없었다. 그러나 눈매와 턱선이 이상하게 닮아 보였다. 아니, 닮아 보이도록 선택된 사진일 수도 있었다. 누군가 노민지를 흔들기 위해, 장천길과 같은 방식으로 과거의 귀신을 만들어 붙이고 있었다.

“왜 나입니까?”

“당신이 장천길 의원에게 가장 가까운 문 중 하나니까요.”

“그럼 누가 문을 열고 싶어 합니까?”

리정후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걸 알아내려고 여기 오신 것 아닙니까?”

노민지는 보고서 마지막 장만 찢어 가방에 넣었다. 리정후는 막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장을 가져가게 할 생각이었던 것처럼.

방을 나서기 직전, 리정후가 말했다.

“노 보좌관님. 장천길 의원을 지키려면, 지명길 보좌관을 먼저 말려야 합니다.”

“왜죠?”

“선한 사람은 자기가 들고 있는 증거가 칼인지 폭탄인지 구분하지 못합니다.”

노민지는 문고리를 잡은 채 뒤돌아보았다.

“그리고 당신들은 그 폭탄이 터지길 기다리고 있겠죠.”

“터뜨리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피해 방향은 달라집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민지는 문을 열고 나갔다. 골목의 밤공기는 차가웠다. 그녀는 빠르게 걸었다. 택시를 잡으려 했지만 손을 들기 전 멈췄다. 길 건너편에 검은 승용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실내등은 꺼져 있었지만, 앞유리에 희미한 반사가 걸려 있었다. 누군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차를 못 본 척하고 골목 반대편으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승용차도 천천히 움직였다. 따라오는 것인지, 우연히 같은 방향인지 알 수 없었다. 정치판에서 우연은 늘 나중에야 이름을 얻는다. 미행이었는지, 감시였는지, 보호였는지, 혹은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연출이었는지.

그 시각, 이철규는 국정원 연락분석실에서 노민지의 이동 기록을 보고 있었다. 위치 추적이 아니었다. 공식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선거 기간 중 정치인 보좌진을 직접 감시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정당 행사장 주변 CCTV, 공개 주차장 차량번호 인식 기록, 통신사 기지국 통계, 그리고 차휘가 현장에서 찍어 보낸 몇 장의 사진을 조합하면 한 사람의 밤은 충분히 그려졌다.

차휘는 종로 골목 맞은편 편의점 앞에서 종이컵 커피를 들고 있었다. 그는 이어폰으로 낮게 말했다.

“대상자, 청운재에서 나왔습니다. 회색 코트. 손에 가방. 뒤쪽 검은 세단 한 대 움직입니다.”

이철규는 모니터 위 사진을 확대했다. 노민지와 검은 세단. 그리고 청운재 입구에서 몇 분 늦게 나오는 리정후의 옆모습.

“리정후 확인됐나?”

“얼굴 반만 잡혔습니다. 그래도 맞습니다.”

“무리하지 마. 접촉만 확인하면 된다.”

“잡을까요?”

“아니.”

차휘가 짧게 숨을 뱉었다. “늘 확인만 하다가 놓칩니다.”

“지금 잡으면 아무것도 안 나와.”

“놓치면요?”

“놓치는 게 아니라 따라가는 거야.”

이철규는 그렇게 말했지만, 자신도 확신하지 못했다. 해연망의 접촉 방식은 이상했다. 그들은 감추려는 것 같으면서도 일부러 보이게 움직였다. 노민지에게 접근하면서도, 그 접촉을 누군가 보게 만들었다. 그것은 감시를 피하려는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감시자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것에 가까웠다.

이철규는 탁강래에게 보고할 문서를 열었다가 닫았다. 보고서 제목란에는 ‘노민지-리정후 비공식 접촉 확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커서를 한참 바라보았다. 보고하면 탁강래는 어떻게 반응할까. 수사를 확대하라고 할까, 아니면 정치적 파장이 크니 접으라고 할까. 전자의 가능성보다 후자의 가능성이 더 컸다. 그리고 문제는, 탁강래가 왜 접으라고 하는지 자신이 점점 확신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모니터 한쪽에서 새 알림이 떴다. 차휘가 사진 한 장을 전송했다. 청운재 뒤편 좁은 골목, 쓰레기 수거함 옆에 서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었다. 검은 모자, 회색 점퍼, 오른손에 휴대전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철규는 그 자세를 기억했다. 제2장 첫 현장 감시 때 차휘가 놓쳤던 바로 그 남자였다.



차휘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그때 놓친 놈 같습니다.’

이철규는 사진을 확대했다. 남자의 왼쪽 손목에 얇은 검은 팔찌 같은 것이 보였다. 장식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철규는 지난 사건 현장에서 확보한 CCTV 조각에도 같은 형태의 검은 띠가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는 차휘에게 바로 연락했다.

“설인, 접근하지 마.”

하지만 이어폰 너머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차휘.”

잡음이 섞였다. 거리 소리, 자동차 경적, 누군가 욕설을 내뱉는 소리. 그리고 차휘의 낮은 숨소리.

“대상 도주합니다.”

“쫓지 마.”

“놓치면 또 사라집니다.”

“명령이다. 쫓지 마.”

몇 초의 침묵. 그리고 차휘가 이를 악문 듯 말했다.

“시야 유지하겠습니다.”

그 말은 쫓겠다는 뜻이었다. 이철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연락분석실의 형광등이 그의 얼굴을 창백하게 비췄다. 해연망, 노민지, 리정후, 청해전략연구소, 장천길 후원회, 백야, 강윤호. 조각들은 너무 많았고, 아직 그림은 없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조각들을 일부러 한꺼번에 흔들고 있었다.

그날 밤 10시 42분, 장천길 의원실에는 불이 꺼지지 않았다. 장천길은 회의실 테이블 앞에 앉아 지명길이 올린 후원회 자료를 보고 있었다. 노민지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명길은 맞은편에 앉아 있었지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은 이미 충분했다. 이제 남은 것은 장천길이 무엇을 믿느냐였다.

장천길은 한참 뒤 입을 열었다.

“민지는 어디 갔나?”

“확인하러 간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지명길은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청해전략연구소 쪽 라인을요.”

장천길은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노민지가 그 라인을 안다는 말이지?”

“그렇게 보입니다.”

장천길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천장 조명이 그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는 피곤해 보였고, 동시에 어딘가 오래전부터 이 순간을 예상했던 사람처럼 보였다.

“명길아.”

“예, 의원님.”

“정치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은 적이 아니다.”

지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장천길은 천천히 말했다.

“나를 살리겠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가끔 나보다 내 운명을 더 잘 안다고 착각한다.”

그 말이 노민지를 향한 것인지, 지명길 자신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장천길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의원실 전화가 울렸다. 야간 당직 비서가 이미 퇴근한 시간이라 벨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지명길이 받으려 했지만 장천길이 손을 들어 막았다. 그는 직접 수화기를 들었다.

“장천길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무슨 말이 흘러나왔다. 지명길은 들을 수 없었다. 다만 장천길의 표정이 아주 천천히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누구십니까?”

상대는 대답하지 않는 듯했다. 장천길은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 이름을 어디서 들었습니까?”

잠시 후 전화는 끊겼다. 장천길은 수화기를 내려놓지 않은 채 한동안 그대로 있었다.

“의원님.” 지명길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무슨 전화입니까?”

장천길은 천천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강윤호가 살아 있다는군.”

지명길은 숨을 멈췄다.

장천길은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다만 아주 오래된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다시 부른 것처럼,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어.”

그날 밤, 노민지의 가방 안에는 1991년 블라디보스토크 사진 조각이 들어 있었고, 지명길의 책상 위에는 장천길 후원회 명단이 놓여 있었으며, 이철규의 모니터에는 검은 팔찌를 찬 남자의 뒷모습이 떠 있었다. 서로 다른 세 사람이 서로 다른 증거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증거들이 가리키는 방향은 하나였다.

백야는 오래전에 끝난 사건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아직도 그 밤을 사용하고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