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1부 조용한 침투 (11화)

 제1부 조용한 침투

제6장 붉은 겨울

제1절 지하 메시지

국정원 서울 연락분석실의 지하층에는 계절이 없었다.

지상에서는 겨울이 물러나는 중이었다. 남산 기슭의 나무들은 아직 앙상했지만, 낮이 되면 가지 끝에 희미한 물기가 돌았다. 아스팔트 위의 눈은 오래전에 녹았고, 도심의 사람들은 이미 봄 선거 이야기를 했다. 후보 등록, 여론조사, 단일화, 공천 갈등. 거리의 계절은 정치의 계절로 바뀌고 있었다. 그러나 지하층은 늘 같은 온도였다. 서버 냉각 장치의 낮은 울림, 형광등의 흰빛, 밤새 식어 버린 커피 냄새, 오래 닫혀 있던 금속문 특유의 차가운 냄새가 공기를 채웠다.



이철규는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분석실로 내려왔다. 그는 원래 퇴근했어야 했다. 전날 밤부터 이어진 회의는 자정 가까이 끝났고, 탁강래는 모든 팀원에게 공식적으로 휴식을 지시했다. 그러나 이철규는 집으로 가지 않았다. 지상 주차장까지 올라갔다가, 차 문을 열지 않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은 평소보다 더 창백했다. 피곤 때문인지, 아니면 피곤 뒤에 숨어 있는 다른 감각 때문인지 그는 구분하지 못했다.

그를 다시 지하층으로 끌어내린 것은 하나의 단어였다.

사슴눈.

그 단어는 원래 이철규 자신에게 붙은 코드명이었다. 현장 요원 시절, 한 선배가 그의 눈이 너무 얌전해서 오히려 거짓말을 해도 들키지 않을 것 같다고 농담처럼 붙인 이름이었다. 이후 코드명은 문서와 호출명, 작전 기록 속에서 굳어졌다. 그러나 최근 며칠 동안 그 단어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의 주변에 다시 나타나고 있었다. 워싱턴에서 송민희가 받았다는 명함. 서울의 후원회 파일에 접속 중이던 사용자명. 장천길 주변에 도는 익명 메시지. 이제는 그 코드명이 그의 신분을 가리키는지, 누군가가 일부러 그를 향해 던지는 미끼인지 알 수 없었다.

분석실 안에는 차휘가 먼저 와 있었다. 그는 책상에 발을 올린 채 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철규가 문을 열자마자 눈을 떴다. 늘 그랬다. 차휘는 잠을 깊게 자지 못했다. 요원으로서의 장점이기도 했고, 인간으로서의 결함이기도 했다.

“안 잤나?” 이철규가 물었다.

차휘는 의자를 바로 세우며 머리를 긁었다. “형님도 안 주무셨잖습니까.”

“보고서 올린 뒤에는 쉬라고 했을 텐데.”

“쉬었으면 찝찝해서 더 못 잤을 겁니다.”

그는 모니터를 돌려 보였다. 화면에는 짧은 문장들이 줄지어 떠 있었다. 평범한 온라인 게시판의 댓글처럼 보이는 글이었다. 그러나 색깔 표시와 시간대, 반복되는 단어들이 겹쳐져 있었다. 일부 문장은 빨간색으로, 일부 숫자는 파란색으로 표시돼 있었다.

“새벽 2시 반부터 3시 17분까지 올라온 글입니다. 게시판은 셋입니다. 하나는 고시생 커뮤니티, 하나는 낚시 동호회, 하나는 폐쇄된 줄 알았던 지방 대학 동문 게시판입니다.”

이철규는 말없이 화면을 바라보았다. 문장들은 모두 별 의미 없어 보였다.

‘올해는 눈이 늦게 온다.’

‘북쪽 바람보다 남쪽 비가 먼저다.’

‘붉은 장갑은 세탁하지 말 것.’

‘첫눈은 개표 전날에 내린다.’

‘사슴눈은 남쪽을 보고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이철규의 시선이 멎었다. 차휘는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거, 장난 아닙니다.”

“원문은?”

“삭제됐습니다. 올라오고 평균 9분 뒤에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크롤링 백업에 걸렸습니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할지, 누가 일부러 걸리게 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철규는 의자에 앉지 않았다. 서 있는 자세 그대로 손가락으로 화면의 문장들을 하나씩 짚었다. 의미 없는 말처럼 보이는 문장들이었다. 하지만 정보기관에서 오래 일한 사람은 의미 없는 말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말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잡담, 농담, 은유, 시처럼 보이는 것들. 그러나 일정한 시각, 일정한 장소, 일정한 반복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메시지가 된다. 그리고 메시지의 진짜 의미는 단어가 아니라 배치에 숨어 있다.

“해연망하고는 결이 다르다.”

이철규가 말했다.

차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해연망 쪽은 돈과 사람을 길게 태웁니다. 재단, 연구소, 포럼, 후원금, 자문 계약. 흔적은 남지만 설명할 수 있는 흔적이죠. 그런데 이쪽은…”

“짧고 거칠어.”

“네. 목적이 설득이나 포섭이 아닌 것 같습니다. 신호에 가깝습니다.”

이철규는 드디어 의자에 앉았다. 화면 아래쪽에는 차휘가 붙여 둔 임시 분류명이 있었다.

미확인 북방계 통신망 — 가칭 R/W.

“R/W?”

“Red Winter. 임시로 붙였습니다.”

“붉은 겨울.”

이철규는 그 말을 낮게 되뇌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름이었다. 너무 문학적이었고, 그래서 오히려 불길했다. 코드명은 대개 건조해야 한다. 작전명이나 조직명에 감정이 들어가면 판단이 흐려진다. 하지만 차휘가 붙인 이름은 이상하게 화면 속 문장들과 잘 맞았다. 눈, 겨울, 북쪽, 붉은 장갑, 첫눈. 누군가는 일부러 계절의 언어를 쓰고 있었다.

“언제부터 추적했지?”

“후원회 파일에서 DEER-EYES 접속 흔적이 뜬 뒤부터요. 그 사용자명이 내부에서 빠져나간 건지, 바깥에서 일부러 흉내낸 건지 확인하다가, 같은 시간대에 이상한 검색 패턴이 잡혔습니다. ‘사슴눈’, ‘장천길’, ‘강윤호’, ‘동부선’, ‘백야’가 서로 다른 커뮤니티에서 비슷한 시간 간격으로 튀었습니다.”

이철규는 미간을 좁혔다. “커뮤니티 여론 작업?”

“그렇게 보기엔 글 수가 너무 적습니다. 여론을 만들려면 양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건 양보다 위치가 이상합니다.”

차휘는 화면을 전환했다. 지도 위에 붉은 점들이 찍혔다. 서울, 인천, 대전, 울산, 광주, 제주. 점들은 전국에 흩어져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일정한 축을 따라 배열된 것처럼 보였다. 특히 서울 남서부와 수도권 외곽 산업단지 주변에 점들이 몰려 있었다.

“접속 위치는 대부분 우회된 겁니다. 직접 추적은 어렵습니다. 그런데 글이 올라간 게시판 계정들 중 일부가 오래전부터 활동 이력이 있습니다. 낚시, 취업, 대학 동문, 노동 상담, 지역 맘카페까지 섞여 있습니다. 가짜 계정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진짜 사람들이 오래 써 오던 계정입니다.”

“해킹당했거나, 빌려줬거나, 직접 쓰고 있거나.”

“세 번째가 제일 문제죠.”

차휘는 다음 화면을 열었다. 이번에는 민중자치연대와 전국산업노동연맹 산하 몇몇 지역 조직의 공개 행사 일정표였다. 집회, 토론회, 산업재해 추모제, 노동법 개정 촉구 기자회견. 대부분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일정이었다. 그러나 일부 일정 옆에는 차휘가 검은색 별표를 해 두었다.

“이 게시글이 올라온 날, 또는 그 다음 날에 이 일정들이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 겹칩니다.”

이철규는 화면을 읽었다. 그중 몇몇 행사명은 정치부 기사에서 본 적이 있었다. 대통민정당 일부 의원이 참석 예정인 정책토론회, 참의당이 주최하는 비정규직 간담회, 전국산업노동연맹 지역본부의 추모집회. 정상적인 시민사회 일정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 일정들 주변에 누군가가 비밀 메시지를 심고 있다는 점이었다.

“단체 전체가 문제라는 뜻은 아니다.”

이철규가 낮게 말했다.

차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입술을 다문 뒤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서 문구도 조심했습니다. ‘단체 내부 또는 주변부에 접근한 미확인 세력’이라고 썼습니다.”

“조심해야 한다. 선거철이다. 정상적인 시민단체나 노동단체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순간, 우리가 바로 정치개입 세력이 된다.”

“그럼 상대는 그걸 노리고 있는 거겠죠.”

이철규는 차휘를 바라보았다. 차휘의 눈에는 잠이 부족한 사람의 충혈만 있는 게 아니었다. 분노가 있었다. 차휘는 현장형 요원이었다. 조용히 기다리며 사람을 따라가고, 틀어진 문장 하나를 붙잡아 몇 달씩 파고드는 일을 잘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추적 대상이 누군가의 삶과 단체와 신념 속에 숨어들 때마다 유독 예민해졌다. 그의 가족사 때문이었다. 예전 정권 시절, 그의 작은아버지가 간첩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몇 년 뒤 무죄가 확정되었다. 그 일은 차휘의 집안을 오래 흔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차휘는 그 상처를 안고 국정원에 들어왔다. 그는 간첩을 누구보다 증오했지만, 동시에 간첩이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사람을 짓밟는 국가도 증오했다.

그래서 차휘는 위험했다. 적을 향한 분노와 국가를 향한 불신을 동시에 품은 요원은 때때로 가장 날카로운 칼이 되지만, 손잡이를 잡은 사람의 손도 벤다.

“설인.”

이철규가 코드명을 불렀다. 차휘는 자세를 바로 했다.

“이번 건은 네 분노로 따라가면 안 된다.”

“제 분노가 아니라 데이터입니다.”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분노다.”

차휘의 턱 근육이 굳었다. 그러나 그는 반박하지 않았다. 이철규는 그런 차휘를 보며, 스스로에게도 같은 말을 해야 한다고 느꼈다. 사슴눈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그는 이미 평정심을 잃고 있었다.

분석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야간 당직 분석관 박도진이 파일철을 들고 들어왔다. 사십대 중반의 그는 현장 경험은 적었지만, 오래된 공개자료와 폐쇄망 기록을 맞춰 보는 일에 능했다. 그는 이철규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뒤 파일철을 책상 위에 놓았다.



“말씀하신 단어들로 과거 기록을 다시 긁어 봤습니다. ‘붉은 겨울’은 공식 작전명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어디서?”

“하나는 1994년 대공 수사 자료의 참고 메모입니다. 원문은 ‘겨울 붉은 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마 당시 북한계 지하 연락망을 부르던 비공식 표현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2008년 국외 정보보고인데, 러시아 극동 지역에서 활동하던 한반도 관련 브로커가 ‘Red Winter will return when White Night melts’라는 말을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차휘가 낮게 욕을 삼켰다. 이철규는 파일철을 펼쳤다. 누렇게 바랜 복사본 위에 영어 문장이 흐릿하게 찍혀 있었다.


Red Winter will return when White Night melts.

붉은 겨울은 백야가 녹을 때 돌아온다.


문장은 시처럼 보였다. 그러나 정보기관 기록 안의 시적인 문장은 대개 누군가 죽었거나, 죽을 예정이었거나,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돌아온다는 뜻이었다.

“백야와 연결된다.”

박도진이 말했다.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야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지하층의 공기가 한 겹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장천길의 과거, 강윤호의 실종, 탁강래의 젊은 시절 작전, 송민희가 받은 명함, 후원회 파일의 이상한 접속. 서로 다른 사건들이 하나의 오래된 이름 주변으로 천천히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기록, 누가 열람했습니까?” 이철규가 물었다.

박도진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최근 10년 동안 열람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사흘 전에 한 번 열렸습니다.”

“누구 계정으로?”

“관리자 권한입니다.”

“이름은?”

박도진은 잠시 망설였다. “탁강래 차장님 계정입니다.”

분석실 안의 냉각 장치 소리가 갑자기 커진 것처럼 느껴졌다. 차휘가 바로 몸을 일으켰다.

“봤죠? 제가 말했잖습니까. 차장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앉아.” 이철규가 말했다.

“형님.”

“앉으라고.”

차휘는 이를 악물고 다시 앉았다. 이철규는 파일을 덮지 않았다. 탁강래가 사흘 전에 이 기록을 열람했다. 그 사실 자체가 배신을 뜻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상관으로서 당연한 행동일 수 있다. 문제는 그가 이철규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해연망 수사를 줄이라고 지시한 바로 그 시점에 이 기록을 열었다는 점이었다.



이철규는 탁강래의 얼굴을 떠올렸다. 피로한 눈, 단정한 말투, 늘 한 박자 늦게 내놓는 지시. 그는 국가를 위해 필요하다면 더러운 일도 감당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 믿음이 진실일 때도 있었고, 진실을 덮는 변명이 될 때도 있었다.

그때 분석실 가장 안쪽 전화기가 울렸다. 폐쇄망 전용선이었다. 새벽 시간에 그 전화가 울리는 일은 드물었다. 박도진이 수화기를 들었다가, 곧 이철규에게 눈짓했다.

“팀장님께 온 겁니다.”

이철규가 수화기를 받았다. “이철규입니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주 낮은 전기 잡음만 있었다. 그는 끊지 않고 기다렸다. 몇 초 뒤, 누군가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남자 목소리였다. 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다. 일부러 목을 긁어 낮춘 듯한 목소리.

“사슴눈.”

차휘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이철규는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누구지?”

“첫눈은 북쪽에서 오지 않는다.”

“소속을 말해.”

“당신들은 늘 북쪽만 본다. 그래서 남쪽에서 올라오는 겨울을 못 본다.”

이철규는 박도진에게 추적 신호를 보냈다. 박도진은 곧장 키보드를 두드렸다. 그러나 폐쇄망 전화에 걸려온 외부 신호라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했다. 누군가 내부 번호를 알고 있거나, 내부를 통해 우회했다는 뜻이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아주 작게 웃었다.

“강윤호는 죽지 않았다.”



이철규는 눈을 감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는 그에게도 충격이었다. 전날 밤 장천길에게 걸려온 익명 전화와 같은 내용이었다. 강윤호가 살아 있다. 죽은 사람, 사라진 사람, 혹은 사라진 것으로 처리된 사람. 그 이름이 이제 국정원 폐쇄망 전용선으로 들어왔다.

“어디 있지?”

“백야가 끝난 곳.”

“백야가 끝난 곳이 어디냐?”

“끝나지 않았으니, 끝난 곳도 없다.”

남자는 다시 침묵했다. 이철규는 끊기 전에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붉은 겨울은 누구의 명령을 받나?”

이번에는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웃음기가 사라지고, 이상할 정도로 평평해졌다.

“명령은 북쪽에서 오지만, 문은 남쪽에서 열린다.”

전화가 끊겼다.

분석실에는 몇 초 동안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박도진의 손만 키보드 위에서 멈춰 있었다. 차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추적은요?”

박도진은 화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잡힙니다. 내부 교환기 로그에는 남아 있는데, 발신 경로가 비정상입니다. 번호가 없습니다. 연결 기록이 있는데 발신자가 없습니다.”

“내부에서 걸었다는 뜻입니까?”

“그렇게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내부 구조를 모르면 이런 방식은 어렵습니다.”

차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건 바로 차장님께 보고해야 합니다. 아니, 차장님이 아니라 원장 라인으로 올려야 합니다.”

“보고는 내가 한다.”

“형님, 또 묵히실 겁니까?”

“보고한다고 했다.”

“누구한테요?”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탁강래에게는 바로 보고하지 않겠다는 뜻. 차휘는 그 뜻을 알아듣고도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철규는 수화기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지금부터는 선택의 문제였다. 절차대로라면 즉시 상관에게 보고해야 한다. 내부 통신망 침입 의심, 북한계 공작망과 연관된 암호성 통신, 장천길과 강윤호 관련 중복 제보, 백야 작전 기록의 비정상 열람. 하나만으로도 보고 사안이었다. 그러나 보고 라인의 맨 위에는 탁강래가 있었다. 그리고 탁강래는 이미 사흘 전에 백야 관련 기록을 열람했다.

보고를 올리는 순간, 진실은 보호될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때 차휘의 개인 단말이 짧게 진동했다. 작전용 단말이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고 표정이 굳었다.

“뭐야?” 이철규가 물었다.

차휘는 단말을 내밀었다. 익명 전송이었다. 사진 한 장과 짧은 문장. 사진에는 낡은 지하 통로가 찍혀 있었다. 콘크리트 벽, 오래된 형광등, 물기 어린 바닥. 위치 정보는 없었다. 그러나 벽 한쪽에 희미하게 남은 낙서가 보였다.

붉은 겨울은 첫눈 아래에서 시작된다.

사진 아래 문장은 더 짧았다.

오늘 밤 23:40. 영등포 7번 환승통로.

차휘의 눈에 불이 들어왔다. “나가겠습니다.”

“혼자 안 된다.”

“그럼 같이 가시죠.”

이철규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너무 노골적인 미끼였다. 그러나 미끼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물어야 하는 순간이 있다. 상대가 던진 것이 미끼인지, 아니면 미끼처럼 보이게 만든 구조 신호인지 확인하려면 결국 현장으로 가야 한다.

“박 분석관.”

“네.”

“이 전화 기록과 게시글 원본, 백야 관련 열람 로그를 복사해. 폐쇄 저장소 두 군데에 나눠 보관해. 하나는 공식, 하나는 비공식.”

박도진은 잠시 이철규를 보았다. 공식과 비공식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를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탁강래 차장에게는 아직 올리지 않는다.”

차휘가 숨을 멈춘 듯했다. 이철규는 그를 보지 않았다. 한 번 말한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선이었다. 조직에서 상관을 의심한다는 것은 내부 감찰 보고서 한 줄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 순간부터 모든 말과 침묵이 기록이 되고, 모든 기록은 나중에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된다.

분석실 바깥 복도는 조용했다. 이철규는 코트를 집어 들었다. 차휘도 장비 가방을 챙겼다. 박도진은 화면 앞에 남아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였다.

문을 나서기 전, 이철규는 다시 한 번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게시판에서 삭제된 문장들이 아직 화면에 떠 있었다.

첫눈은 개표 전날에 내린다.

사슴눈은 남쪽을 보고 있다.

그는 그 문장들을 오래 보았다. 자신을 향한 협박인지, 경고인지, 아니면 누군가 그를 이용해 다른 사람을 움직이려는 설계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해연망은 사람을 끌어들였고, 붉은 겨울은 사람을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전자는 조용히 그물처럼 퍼졌고, 후자는 어둠 속에서 신호탄처럼 터졌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며 지하층의 흰빛이 잘려 나갔다. 차휘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철규도 말하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방금 전 통화의 마지막 문장이 여전히 떠 있었다.

명령은 북쪽에서 오지만, 문은 남쪽에서 열린다.

서울의 아침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어딘가에서는 그 문을 여는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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