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1부 조용한 침투 (12화)

 제1부 조용한 침투

제6장 붉은 겨울

제2절 통제되지 않는 불씨



밤 11시 32분, 영등포역 지하 환승통로는 하루의 마지막 피로를 끌고 가는 사람들로 묵직하게 흐르고 있었다. 퇴근이 늦어진 직장인들은 어깨를 구부린 채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왔고, 술기운이 남은 남자 둘은 서로의 팔을 붙잡은 채 웃다가 갑자기 말수가 줄었다. 편의점 앞에는 컵라면 국물을 비우는 젊은 배달기사가 서 있었고, 지하상가 셔터들은 절반쯤 내려간 채 금속성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역무원의 안내 방송은 천장 스피커에서 조금 찢어진 소리로 울렸고, 바닥의 낡은 타일 위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물기처럼 번졌다.

이철규는 7번 환승통로에서 조금 떨어진 기둥 뒤에 서 있었다. 회색 점퍼에 검은 백팩, 손에는 오래된 스마트폰 하나.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도록 맞춘 차림이었다. 그러나 그의 눈은 평범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훑는 속도는 빠르지 않았으나, 한 번 걸린 움직임은 놓치지 않았다. 손목을 만지는 습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의 발끝 방향, 통화하는 척하면서 말을 하지 않는 입술, 가방끈을 필요 이상으로 자주 고쳐 매는 동작. 현장은 언제나 작은 어긋남으로 먼저 말을 건넸다.

무전기는 쓰지 않았다. 공식 작전이 아니었다. 탁강래의 허가도 받지 않았다. 보고서에는 ‘신뢰도 낮은 온라인 암호문’ 정도로만 처리될 정보였고, 원칙대로라면 현장 확인이 아니라 장기 감시로 넘기는 게 맞았다. 그러나 폐쇄망 전화로 들어온 음성, “강윤호는 죽지 않았다”는 말과 이어진 시간·장소 표식은 이철규의 판단을 바꾸었다. 누군가 이철규가 움직일 것을 알고 미끼를 던졌다면, 그 미끼 자체가 정보였다.

그는 왼쪽 이어폰을 만졌다. 통화 중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한 소형 수신기였다.

“설인, 위치.”

몇 초 뒤 차휘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7번 통로 남쪽 계단. 신문 가판대 쪽. 검은 패딩 하나, 빨간 목도리 하나, 회색 캡 하나. 셋 다 두 번 이상 같은 동선 반복했습니다.”

“확인만 해. 접근 금지.”

“알겠습니다.”

대답은 빨랐지만, 이철규는 그 빠름이 마음에 걸렸다. 차휘는 작전 전에 지나치게 조용해지는 타입이었다. 평소에는 농담처럼 툭툭 말을 던지다가도, 현장에서 감정이 앞서면 오히려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난번 연락책을 놓친 뒤부터 그는 계속 그랬다. 자신이 실수했다는 생각, 누군가 일부러 자신에게 얼굴을 노출했다는 분노, 그리고 탁강래가 작전을 접으라고 했을 때 느낀 모욕감이 차휘의 안쪽에서 식지 않고 있었다.

“설인.”

“예.”

“오늘은 잡는 날 아니다. 보는 날이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그 침묵 끝에 차휘가 말했다.

“보는 것만 하다가 또 놓치면요?”

“놓치면 놓친 이유를 알게 된다.”

“죽으면요?”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하철 진입 알림음이 통로 끝에서 짧게 울렸다. 사람들의 걸음이 한순간 빨라졌다가 다시 흩어졌다. 그 소리들 사이로 차휘의 숨소리가 아주 낮게 들렸다.

“설인. 명령이다.”

“확인.”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이철규는 통화 화면처럼 보이도록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7번 통로 입구를 주시했다. 전광판 아래에 서 있던 여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30대 후반쯤, 검은색 롱패딩에 낡은 캔버스백을 메고 있었다. 얼굴에는 특별한 특징이 없었다. 그러므로 더 눈에 띄었다. 이런 현장에 나온 사람은 대개 너무 평범해 보이려고 애쓴다. 여자는 휴대전화로 시간을 확인하고, 오른손으로 가방끈을 두 번 눌렀다. 약속된 신호처럼 보였다.

몇 초 뒤, 반대쪽에서 중년 남자가 걸어왔다. 회색 모자, 마스크, 손에는 작은 종이 쇼핑백. 그는 여자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의 옆을 지나는 순간, 쇼핑백 손잡이를 바꿔 쥐었다. 여자는 그 동작을 보지 않는 척했지만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이철규는 그 남자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남자의 왼쪽 손목에는 검은 팔찌가 있었다. 차휘가 두 번이나 보고한 표식. 한중문화교류재단 주변에서 처음 나타났고, 노민지와 리정후가 접촉했던 청운재 인근 CCTV에도 희미하게 잡혔던 물건. 단순한 장신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첩보 현장에서 반복되는 우연은 대개 우연이 아니었다.

“설인, 검은 팔찌 남자 보이나.”

“보입니다.”

차휘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지나치게 낮아졌다.

“접근하지 마.”

“저 사람입니다.”

“설인.”

“지난번에도 저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락책 죽은 날에도.”

“접근하지 마.”

이철규는 기둥에서 떨어져 천천히 움직였다.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섞이며 팔찌 남자와 여자의 거리를 계산했다. 쇼핑백은 아직 남자 손에 있었다. 교환이 끝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만남은 전달이 아니라 확인, 혹은 낚시였다. 누가 현장에 나오는지 확인하기 위한 자리일 가능성이 컸다.

그때 여자의 뒤쪽에서 젊은 남자 하나가 나타났다. 회색 후드티 위에 작업복 조끼를 걸친 차림이었다. 그는 지하상가 청소노동자처럼 보였지만, 손에는 청소도구가 없었다. 대신 주머니 속 무언가를 계속 만지고 있었다. 이철규는 순간적으로 동선을 다시 그렸다. 여자, 팔찌 남자, 후드티 남자. 세 사람은 서로를 직접 보지 않았지만,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목적이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여자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팔찌 남자는 주변을 확인하고 있었다. 후드티 남자는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의 눈은 다르다. 초조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자기편이라고 믿는 눈. 이철규는 그 눈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폭발물을 가진 사람, 혹은 폭발물보다 더 위험한 소문을 가진 사람의 눈이었다.

“설인, 후드티 확인.”

“제가 봅니다.”

“내가 간다. 넌 팔찌 남자 유지.”

그러나 이어폰 속에서 차휘의 대답이 들리지 않았다.

“설인.”

통로 오른쪽 계단 아래, 차휘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평범한 행인처럼 빠르게, 그러나 이철규가 보기에는 너무 곧장. 그는 팔찌 남자 쪽으로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이철규는 낮게 욕을 삼켰다.

“설인, 정지.”

차휘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들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팔찌 남자의 손목에 박혀 있었다. 현장에서 한 사람에게 시선이 박히면 주변을 잃는다. 이철규는 발걸음을 빠르게 바꾸었다. 동시에 후드티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가 향한 곳은 여자도, 팔찌 남자도 아니었다. 환승통로 벽면에 붙은 무인 보관함이었다.

보관함 27번. 문틈에 흰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스티커에는 작은 매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붉은 겨울의 암호문에서 반복되던 ‘겨울 매화’. 이철규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설인, 후드티가 진짜다.”

그제야 차휘의 발걸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팔찌 남자가 차휘의 접근을 눈치챘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너무 천천히, 너무 침착하게. 그리고 여자 쪽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그 순간 여자와 차휘 사이에 노인 하나가 끼어들었다. 우연한 행인처럼 보였지만, 그의 지팡이 끝이 차휘의 발목을 스치듯 건드렸다. 차휘의 몸이 아주 짧게 기울었다.

후드티 남자는 보관함 앞에서 멈췄다. 그는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 화면을 문틈에 가져다 댔다. 근거리 태그. 문이 열리는 소리가 통로의 소음 속에 묻혔다. 그는 안쪽에서 작은 검은 봉투를 꺼냈고, 동시에 보관함 안에 다른 무언가를 넣었다.

이철규는 달렸다.

그 움직임이 현장을 깨웠다. 평범한 사람들의 흐름 속에서 누군가가 달리기 시작하면, 모든 위장은 반 박자씩 늦게 무너진다. 여자는 놀라 뒤로 물러났고, 팔찌 남자는 쇼핑백을 발로 밀었다. 쇼핑백은 사람들 발밑으로 쓰러져 안쪽의 전단지 묶음을 쏟았다. 붉은 글자가 얼핏 보였다. “피의 임금”, “경찰 폭력”, “거리로”. 선전물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이라면 굳이 이렇게 숨길 필요가 없었다.

후드티 남자가 이철규를 돌아봤다. 그의 눈이 아주 짧게 이철규의 얼굴에 멈췄다. 아는 얼굴을 확인하는 눈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누가 올지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사슴눈.”

그가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철규는 분명히 읽었다.

후드티 남자는 봉투를 품에 넣고 뛰었다. 이철규가 따라붙기 직전, 보관함 안쪽에서 짧은 전자음이 울렸다. 삐, 삐, 삐. 너무 작은 소리였지만, 주변 소음과 어울리지 않아 오히려 더 선명했다. 이철규는 본능적으로 사람들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뒤로 물러나세요!”

사람들은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누군가는 짜증스럽게 돌아봤고, 누군가는 영상을 찍으려고 휴대전화를 들었다. 이철규는 신분증을 꺼내 보일 수도 없었다. 작전은 비공식이었고, 현장에서 신분을 노출하는 순간 사건은 다른 국면으로 번졌다. 그는 보관함 문을 열어젖혔다.

안에는 작은 기계장치가 있었다. 폭발물은 아니었다. 낡은 휴대전화 두 대와 소형 스피커, 보조배터리, 그리고 붉은색 스티커가 붙은 USB 하나. 전자음은 예약 통화 알림이었다. 잠시 뒤 스피커에서 녹음된 음성이 터져 나왔다.

“노동자의 피는 선거의 장식이 아니다. 오늘 밤, 첫 불씨를 보아라.”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누군가 “뭐야, 장난이야?”라고 말했다. 그 순간 지하상가 반대편에서 고성이 터졌다. 팔찌 남자가 사라진 방향이었다. 이철규는 보관함 장치를 꺼내 백팩 안에 밀어 넣고, 차휘를 찾았다.

차휘는 팔찌 남자를 쫓고 있었다. 아니, 쫓는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팔찌 남자는 이미 흐름을 만들고 있었다. 지하상가 셔터 앞에서 한 남자가 일부러 넘어졌고, 다른 여자가 비명을 질렀다. 몇 명이 몰려들었고, 길이 막혔다. 차휘는 그 사이를 뚫으려 했지만, 팔찌 남자는 사람들 사이로 녹아들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5번 출구 쪽 계단이었다.

“설인, 멈춰!”

이철규의 목소리가 이번에는 실제로 통로를 찢었다. 차휘가 돌아봤다. 그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혹감이 동시에 떠 있었다. 놓쳤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또 미끼를 물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얼굴이었다.

그때 쇼핑백을 들고 있던 여자가 반대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도망칠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처럼 빠르게 움직였지만, 발걸음에는 훈련된 사람의 안정감이 없었다. 일반인. 혹은 일반인을 억지로 현장에 끌어낸 연락책. 이철규는 차휘를 향해 손짓했다.

“여자. 살려서 잡아.”


차휘의 눈이 흔들렸다. 팔찌 남자를 쫓고 싶은 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그러나 이번에는 멈췄다. 그는 이를 악물고 방향을 바꿨다. 여자는 지하철 개찰구 쪽으로 뛰었다. 차휘가 뒤따랐다.

이철규는 후드티 남자의 방향을 택했다. 9번 출구로 이어지는 긴 계단. 후드티는 이미 반쯤 올라가고 있었다. 이철규는 사람들을 피해 계단을 두 칸씩 뛰었다. 계단 위로 올라가자 밤공기가 차갑게 얼굴을 때렸다. 영등포역 앞 도로는 택시와 버스, 오토바이 불빛으로 복잡했다. 후드티 남자는 길 건너편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철규가 횡단보도 앞에 도착했을 때 신호가 바뀌었다. 차들이 한꺼번에 움직였다. 그는 차 사이로 뛰어들 수 없었다. 현장 판단은 늘 잔인했다. 한 사람을 잡기 위해 더 큰 사고를 만들 수는 없었다. 후드티 남자는 길 건너편에서 잠깐 멈춰 섰다. 그리고 이철규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워싱턴에서 송민희가 보았던 그 남자의 동작과 이상할 정도로 닮은 짧은 인사였다.

그는 손가락 두 개로 자기 눈을 가리킨 뒤, 다시 이철규 쪽을 가리켰다.

보고 있다.

그 의미를 남기고 후드티 남자는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이철규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살폈다. 골목 안으로 무리하게 들어가면 또 다른 함정일 수 있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내 골목 입구 CCTV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환승통로는 이미 작은 소란의 현장이 되어 있었다. 역무원들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있었고, 누군가는 방금 전 스피커에서 나온 음성을 인터넷에 올리겠다며 흥분해 있었다. 몇몇은 선전물 사진을 찍었고, 몇몇은 그냥 불쾌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났다. 현장은 폭발하지 않았지만, 충분히 더러워졌다. 이것이 목적이었을지도 몰랐다. 실제 폭탄보다 효율적인 것은 가끔 불안 그 자체였다.

차휘는 개찰구 옆 비상계단에서 여자를 붙잡고 있었다. 여자는 숨을 헐떡였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차휘의 손은 그녀의 팔을 단단히 잡고 있었지만, 이전처럼 거칠지는 않았다. 이철규가 다가가자 여자는 거의 울먹이며 말했다.

“저는 몰랐어요. 그냥 받으라고 해서 받은 거예요.”

“누가.”

이철규의 목소리는 낮았다.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차휘가 이를 악물었다.

“누가 시켰냐고.”

“저는… 저는 노동연맹 홍보팀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이름.”

“오세란. 전국산업노동연맹 서울남부지부 홍보팀장이라고…”

이철규와 차휘는 동시에 눈빛을 교환했다. 전국산업노동연맹. 붉은 겨울 메시지에서 계속 주변부로 등장하던 이름이었다. 그러나 이철규는 단체 이름이 나왔다고 해서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공작은 늘 명분 있는 조직의 가장자리부터 더럽혔다. 중심이 아니라 주변, 공식 라인이 아니라 비공식 지인, 지도부가 아니라 실무자, 실무자가 아니라 그 실무자의 오래된 친구. 그러다 일이 터지면 조직 전체가 의심받고, 의심받는 조직은 자기 방어에 급급해진다. 그 틈에 진짜 조종자는 빠져나간다.

“무엇을 받으라고 했지.”

여자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쇼핑백이요. 안에 전단지가 있다고 했어요. 내일 기자회견장에 가져다 놓으라고…”

“기자회견장?”

“대통민정당 노동공약 발표 현장이라고 들었어요.”

차휘가 낮게 중얼거렸다. “선전물을 대통민정당 행사장에 뿌리고, 그걸 자유우국당 쪽에서 공격하게 만들려는 건가.”

“그 정도면 너무 단순해.”

이철규는 여자의 손을 보았다. 손끝에 검은 잉크가 묻어 있었다. 전단지를 만진 흔적이 아니라 복사기 토너에 가까웠다. 그는 물었다.

“오늘 몇 장을 복사했습니까.”

여자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몇 장.”

“오백 장 정도요.”

“문구는 누가 줬습니까.”

“메일로 받았어요. 계정은… 지메일 같은 게 아니라, 이상한 임시 메일이었고… 저는 그냥 지부 사람들이 쓰는 줄 알았어요.”

이철규는 차휘에게 눈짓했다. “휴대폰.”

차휘가 여자의 휴대전화를 받아 잠금 해제를 요구했다. 여자는 망설였지만 결국 패턴을 그렸다. 메시지함에는 평범한 대화가 많았다. 임금 체불, 기자회견 일정, 피켓 문구, 지부 회의 안내. 그러나 임시 메일 계정에서 온 첨부파일 하나가 남아 있었다. 제목은 ‘겨울매화_시안3’. 파일 안에는 전단지 문구와 함께 작은 QR 코드가 들어 있었다.

차휘가 QR 코드를 확대했다. “이거 열면 뭐가 나오죠?”

“직접 열지 마.”

이철규는 장치를 자신의 보조 단말기에 격리해서 연결했다. 몇 초 뒤 화면에 짧은 주소가 떴다. 일반 웹페이지가 아니라 시간 제한이 걸린 영상 링크였다. 제목은 없었다. 썸네일에는 피 흘리는 경찰 방패처럼 보이는 이미지가 있었다. 조작된 이미지일 가능성이 컸다.

“내일 이걸 기자회견장에서 퍼뜨리려던 거군요.” 차휘가 말했다.

“아니. 오늘 밤 퍼뜨리려고 했던 거다.”

이철규는 이미 주변에서 휴대전화를 들고 촬영하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보관함에서 흘러나온 음성, 바닥에 쏟아진 전단지, 갑작스러운 추격, 겁먹은 여자의 모습. 누군가 그 모든 장면을 잘라 붙이면 충분히 ‘국정원 혹은 경찰이 노동단체 관계자를 불법으로 쫓는 장면’처럼 만들 수 있었다. 사실과 거짓을 반반 섞으면 거짓은 훨씬 오래 살아남는다.

“우리가 현장에 나온 것까지 포함해서 설계한 겁니다.”

차휘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우리를 부른 게 붉은 겨울입니까?”

“일부는.”

“일부요?”

이철규는 보관함에서 회수한 장치를 떠올렸다. 붉은 겨울의 상징, 노동단체 주변부, 가짜 영상 링크. 하지만 팔찌 남자는 해연망 쪽에서 보이던 표식과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팔찌 남자는 혼란을 키우기보다는 누가 현장에 나오는지 확인한 뒤 빠져나갔다. 두 세력이 같은 장소에 있었지만, 같은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는 두 개의 판이 겹쳤다.”

차휘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철규는 낮게 말했다. “붉은 겨울은 불을 붙이려 했다. 해연망은 누가 불을 끄러 오는지 보러 왔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철규의 업무용 단말기가 짧게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없음.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불씨는 통제되지 않을 때 가치가 있다.’

이어 두 번째 메시지가 떴다.

‘사슴눈, 당신은 오늘도 늦었다.’

차휘가 화면을 보고 주먹을 쥐었다. “이 새끼들이…”

“반응하지 마.”

“우리 번호를 압니다.”

“그러니까 반응하지 말라는 거다.”

이철규는 메시지를 캡처한 뒤 단말기를 비행기 모드로 전환했다. 누군가 그들이 여기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장의 세력이든, 국정원 내부의 누군가든, 아니면 둘 다든. 이제 더 이상 온라인 암호문 몇 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때 역무원 한 명이 다가왔다. “저기요,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방금 뭔 일입니까?”

이철규는 지갑에서 일반 신분증을 꺼내 보였다. 공식 신분은 아니었다. “민간 보안 점검 중이었습니다. 장난 신고로 보입니다. 신고는 하시되, 사람들 대피시키지 말고 평소처럼 정리해 주세요. 괜히 소문 커지면 더 위험합니다.”

역무원은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혼란을 더 키우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차휘는 여자를 다시 보았다. “이 사람은요?”

“공식 체포 못 한다.”

“왜요?”

“우리가 여기 있었다는 기록을 남길 수 없으니까.”

차휘의 눈에 불만이 떠올랐다. “그럼 또 놓칩니까?”

“놓치는 게 아니라, 따라붙는 거다.”

이철규는 여자에게 다가갔다. “오세란이 다시 연락하면 받으십시오. 단,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십시오.”

여자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신들 경찰 아니죠?”

“경찰이면 당신은 지금 조사실에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여자의 얼굴이 더 하얘졌다.

“집에 가십시오. 하지만 전화기는 끄지 마십시오. 꺼지면, 당신을 이용한 사람들이 당신을 버렸다고 판단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가 아니라 그 사람들이 먼저 찾아올 겁니다.”

여자는 입술을 떨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휘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철규를 바라봤지만, 더 말하지 않았다. 여자가 사라진 뒤에야 그는 낮게 물었다.

“정말 보내도 됩니까?”

“저 사람은 말단이다.”

“말단이라도 증거입니다.”

“증거는 파일에 있고, 휴대폰에 있고, 보관함 장치에 있다. 사람을 잡아 두면 적이 줄을 끊는다. 사람을 풀어 두면 줄이 움직인다.”

차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철규는 그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방금 한 말이 차휘에게 충분히 납득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차휘는 줄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니라, 줄 끝에 묶인 손목을 붙잡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의 장점이었고, 동시에 가장 위험한 약점이었다.

두 사람은 인파가 줄어든 통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바닥에는 아직 전단지 몇 장이 구겨진 채 남아 있었다. 청소노동자가 그것들을 쓰레받기에 쓸어 담고 있었다. 전단지 하나가 이철규의 발끝에 걸렸다. 그는 허리를 굽혀 그것을 주웠다.

전단지 뒷면에는 인쇄되지 않은 작은 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육안으로 보면 단순한 인쇄 오염처럼 보였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마이크로도트. 이철규는 그것을 빛에 비춰 보았다. 점들은 한글도, 숫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배열은 익숙했다. 오래된 암호표. 1990년대 초반, 북방 라인에서 쓰이던 방식과 닮아 있었다.

그의 뒷목이 서늘해졌다.

“왜 그러십니까?”

“이건 붉은 겨울 방식이 아니다.”

차휘가 전단지를 들여다봤다. “그럼요?”

“더 오래된 방식이다.”

“백야입니까?”

이철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대답이 너무 빨리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전단지 뒷면의 점 배열은 백야 작전 자료에서 본 낡은 암호표와 유사했다. 누군가 일부러 그 흔적을 남긴 것이라면, 이것은 메시지였다. 붉은 겨울과 해연망의 현장에 백야의 그림자를 겹쳐 놓는 메시지.

그때 이철규의 개인 휴대전화가 울렸다.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화면에는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떴다. 그는 차휘에게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하고 통화를 받았다.

“이철규입니다.”

잠시 잡음이 흘렀다. 그리고 변조된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본 것은 불씨가 아닙니다. 예고입니다.”

이철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불씨는 아직 켜지지 않았습니다. 켜지는 날, 장천길은 도망갈 수 없고 송민희는 쓰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누구냐.”

상대는 웃지 않았다. 웃음보다 더 건조한 침묵이 짧게 이어졌다.

“강윤호를 찾지 마십시오.”

이철규의 눈빛이 굳었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사슴눈이 너무 오래 남쪽만 보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가끔은 뒤를 봐야 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차휘가 물었다. “뭡니까?”

이철규는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통화 기록은 남아 있었지만, 번호는 곧바로 사라졌다. 표시 없음. 내부 우회망일 가능성이 있었다.


그는 전단지를 접어 증거 봉투 대신 자신의 수첩 안에 넣었다. 공식 증거로 올리는 순간 탁강래에게 바로 올라갈 것이고, 탁강래가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 밤은 보는 날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단순한 현장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세력이 같은 통로에서 서로를 시험하고 있었다. 붉은 겨울은 거리의 분노를 원했고, 해연망은 그 분노를 관리 가능한 정치 자산으로 바꾸려 했다. 그리고 그 두 세력 사이, 혹은 그 뒤 어딘가에서 백야의 낡은 그림자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역 밖으로 나오자 자정이 조금 넘어 있었다. 도로 위에는 아직 차들이 많았고, 건물 간판들은 꺼질 줄 몰랐다. 서울은 쉽게 잠들지 않는 도시였다. 잠들지 않기 때문에 더 쉽게 피로해지고, 피로하기 때문에 더 쉽게 분노했다. 공작을 설계하는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람들을 설득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쌓인 피로에 이름만 붙여 주면 됐다. 누군가의 억울함, 누군가의 분노, 누군가의 불안을 조금만 밀어 주면, 불씨는 스스로 번졌다.

차휘가 담배를 꺼내려다 이철규를 보고 다시 집어넣었다.

“팀장님.”

“말해.”

“오늘 그놈, 일부러 저한테 보인 겁니다.”

“안다.”

“다음엔 안 놓칩니다.”

“다음엔 네가 미끼일 수도 있다.”

차휘는 입을 다물었다. 이철규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위로라기보다는 경고에 가까운 손짓이었다.

“분노는 현장에서 제일 먼저 감청당한다. 네가 뭘 싫어하는지, 뭘 못 참는지, 누구를 잡고 싶어 하는지 상대가 알면 너는 이미 절반쯤 조종당한 거다.”

차휘는 한참 뒤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 고개 끄덕임이 진짜 납득인지, 상관 앞에서의 습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이철규는 지하철역 입구 앞에 잠시 남아 있었다. 그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진 후드티 남자의 마지막 손짓을 떠올렸다. 자기 눈을 가리킨 뒤, 이철규를 가리켰던 그 동작. 보고 있다. 혹은 보게 만들겠다.

그는 수첩을 꺼내 전단지 뒷면의 점 배열을 다시 확인했다. 점들은 작고 조용했다. 그러나 그 작은 점들이 오래전 작전 기록의 문장 하나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White Night never ended.

백야는 끝나지 않았다.


이철규는 수첩을 닫았다. 그 순간, 그의 휴대전화 화면이 다시 한 번 희미하게 켜졌다. 새 메시지는 없었다. 대신 잠금화면 알림창에 조금 전에는 보이지 않던 일정 하나가 떠 있었다.

‘06:30 — 장천길 캠프 후원회 감사 자료 확인.’

그는 그 일정을 입력한 적이 없었다.

이철규는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휴대전화를 껐다. 도시의 소음은 여전히 컸지만, 그에게는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그의 작전 단말기만이 아니라 개인 일정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내부망, 현장, 정치권, 언론, 오래된 백야의 기록. 선들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선들이 많다는 것은, 그 모든 선이 언젠가 하나의 매듭에서 만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매듭이 장천길인지, 강윤호인지, 탁강래인지, 아니면 아직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누군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하나였다.

불씨는 이미 켜져 있었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