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1부 조용한 침투 (3화)

 제1부 조용한 침투

제2장 사슴눈의 보고서

제1절 이상한 문화재단

국가정보원 청사로 들어가는 길은 언제나 지나치게 조용했다. 서울의 도로는 아침부터 신경질적으로 울리고 있었지만, 검문소를 지나 안쪽 도로로 접어들면 소음이 어딘가에서 잘려 나간 듯 급격히 낮아졌다. 도로 양옆의 나무들은 겨울 끝의 마른 가지를 드러낸 채 서 있었고, 낮은 건물들의 창문은 흐린 하늘빛을 무표정하게 되비쳤다. 이철규는 그 침묵을 좋아하지 않았다. 침묵은 안전을 의미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가 배운 세계에서는, 침묵은 대개 누군가가 이미 말을 끝냈거나, 아직 말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청사 안으로 들어서며 그는 출입증을 단말기에 댔다. 짧은 전자음이 울렸다. 문이 열렸다. 통로는 깨끗했고, 바닥에는 먼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벽에 걸린 시계는 오전 7시 42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라기엔 조금 이른 때였지만, 이곳에서 시간은 일반 회사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밤새 보고서를 썼고, 어떤 사람은 이제야 현장 감시를 마치고 돌아왔고, 어떤 사람은 출근한 척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국가의 비밀은 늘 야근을 좋아했다.

이철규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세 층쯤 올라가자 숨이 조금 차올랐다. 그는 일부러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서른여섯. 체력은 아직 충분했지만, 현장과 책상 사이를 오가는 생활은 사람을 빨리 늙게 했다. 계단참의 좁은 창문 밖으로 청사 마당이 보였다. 검은 세단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번호판을 본 순간, 그는 차가 어느 부서 사람의 것인지 알아차렸다. 대공·해외협력 라인. 탁강래의 라인과 가깝다.


그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이철규의 사무실은 공식 명칭이 긴 부서 안쪽에 있었다. 표지판에는 대외안보분석실이라고 적혀 있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하는 일은 훨씬 지저분했다. 해외 정보기관의 움직임을 읽고, 국내 정치·경제 인사와 외국계 조직의 접점을 추적하고, 어디까지가 합법적 로비이고 어디서부터가 정보 작전인지 판단하는 일. 가끔은 판단보다 직감이 먼저였고, 가끔은 직감보다 정치적 허락이 먼저였다.

그의 책상에는 밤새 도착한 파일들이 놓여 있었다. 일부는 종이였고, 일부는 내부망에 암호화된 형태로 올라와 있었다. 그는 코트를 벗어 의자 뒤에 걸고 컴퓨터를 켰다. 모니터가 켜지는 동안 손목시계를 풀어 책상 오른쪽에 놓았다. 화면이 밝아지자 그가 어젯밤까지 작업하던 분석 문서가 자동으로 열렸다.

문서 제목은 간단했다.

한중문화교류재단 자금 흐름 및 국내 인맥 접촉 현황 3차 검토.

표면적으로는 너무 평범한 제목이었다. 한중문화교류재단. 이름만 들으면 대학생 교환연수, 전통문화 공연, 학술 세미나, 청년 리더십 포럼 같은 말들이 따라붙을 법했다. 실제로 그 재단은 그렇게 움직였다. 서울 강남의 깨끗한 사무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계 실무진, 전직 외교관 출신 고문단, 대학 교수 몇 명, 언론사 논설위원 출신 자문위원, 청년 정치 아카데미, 지방자치 국제협력 세미나. 무엇 하나 불법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불법은 잡기 쉽다. 돈 봉투, 위조 여권, 허술한 암호문, 급하게 지운 통화 기록. 그런 것들은 언젠가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합법의 모양을 한 침투는 다르다. 회의록이 있고, 보도자료가 있고, 세금계산서가 있고, 참석자 명단이 있다. 누가 봐도 공개 행사처럼 보인다. 위험한 것은 그 공개성 자체였다.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악수를 하면, 아무도 그 손안에 무엇이 오갔는지 의심하지 않는다.

이철규는 재단의 지난 5년간 행사 목록을 다시 열었다. 서울, 부산, 제주, 베이징, 상하이, 선양, 다롄. 주제는 매번 조금씩 달랐다. 한중 청년 리더십 포럼, 동북아 지방정부 협력 세미나, 기후위기와 산업전환 공동 컨퍼런스, 문화콘텐츠 교류의 미래, 한반도 평화와 경제협력. 행사명만 보면 진보와 보수, 여야를 가리지 않고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주제들이었다.

문제는 참석자였다.

그는 화면을 확대했다. 대통민정당의 초선 의원 보좌관 둘, 자유우국당 중진 의원실 정책비서관 하나, 참의당 노동정책 자문위원, 전직 경찰 간부, 현직 지방경찰청 정보라인 인사, 방송사 정치부 기자, 경제지 논설위원, 대학 통일연구소 연구원. 단순한 교류라고 보기엔 접점이 너무 넓고, 우연이라고 보기엔 반복이 너무 일정했다.

이철규는 마우스를 멈췄다. 명단 중 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노민지.

자유우국당 장천길 의원실 보좌관. 직책은 정무·미디어 전략 담당. 나이는 서른셋. 중국 상하이 소재 대학원 교환과정 1년. 한중문화교류재단 청년정치아카데미 2기 외부강연 참석. 이후 비공개 간담회 두 차례 참석 추정. 공식 회계상 강연료 수령 기록 없음. 출입기록 일부 누락.

이철규는 노민지의 사진을 열었다. 선거 캠프 기자회견 뒤편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검은 정장, 단정한 머리, 감정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표정. 정치권 보좌관 특유의 얼굴이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존재감을 지우지만, 실제 판에서는 후보의 문장과 타이밍을 조종하는 사람들. 그는 사진을 확대했다가 다시 줄였다.

장천길.

그 이름이 이 파일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직은. 하지만 노민지가 장천길의 가장 가까운 실무자 중 하나라는 점은 충분히 중요했다. 더구나 장천길은 최근 총선 국면에서 유난히 공격과 방어의 중심에 서 있었다. 자유우국당 안에서는 미묘하게 견제받고, 대통민정당 쪽에서는 오래된 운동권 경력을 공격받고, 일부 언론은 그를 이상하리만큼 끈질기게 물고 있었다. 그런 정치인을 둘러싼 보좌진이 한중문화교류재단과 반복적으로 접촉했다면, 단순 관심사로 넘기기 어려웠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렸다.

“벌써 나왔습니까?”

차휘였다. 코드명 설인. 스물여덟. 현장 요원치고는 얼굴이 너무 어려 보였고, 사무직이라고 하기엔 걸음이 너무 조용했다. 그는 한 손에 종이컵 커피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머리는 짧게 깎았고, 눈 밑에는 밤샘의 흔적이 옅게 남아 있었다.

“너도 일찍 왔군.”

“일찍 온 게 아니라 늦게 못 간 겁니다.”

차휘는 커피 하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강남 사무실 쪽 밤새 봤습니다. 재단 사람들, 어제 저녁에 또 모였습니다.”

이철규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누구와?”

“겉으로는 문화콘텐츠 투자 간담회였습니다. 참석자 열두 명. 그중 확인된 사람은 언론 쪽 셋, 지방의원 보좌진 둘, 전직 경찰 하나. 그리고…”

차휘가 잠시 말을 끊었다. 이철규는 그가 일부러 뜸을 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노민지로 보이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철규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확실해?”

“사진상으로는 80퍼센트. 직접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건물 1층부터 경비가 이상하게 깔렸습니다. 민간 사무실치고는 동선 통제가 너무 빡빡했습니다.”

차휘는 작은 메모리카드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주차장 진입 차량, 출입자 일부, 뒷문 쪽 영상입니다.”

이철규는 메모리카드를 손끝으로 끌어당겼다. “보고서는?”

“초안 올렸습니다. 그런데 선배님.”

“말해.”

차휘는 문 쪽을 한 번 돌아본 뒤 목소리를 낮췄다. “저쪽 사람들, 우리 감시를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제가 있는 방향으로 일부러 한 번 흔들었습니다. 진짜 표적은 정문 쪽인데, 뒷문으로 사람을 빼는 척했습니다. 따라붙으면 노출되는 구조였습니다. 그래서 안 움직였습니다.”

“잘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우리가 따라붙을 거라고 확신하는 움직임이었습니다. 감시 가능성을 막연히 의식한 게 아니라, 누가 언제 어디서 보고 있는지 어느 정도 아는 사람들처럼 움직였습니다.”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처음이 아니었다. 최근 몇 주 동안, 재단 주변을 살필 때마다 한 발 늦거나 한 발 빨랐다. 마치 상대가 그들의 절차를 알고 있는 듯했다. 물론 외국 정보망이 국내 보안기관의 습관을 연구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 습관이 너무 정확하다는 데 있었다.

“차휘.”

“예.”

“오늘부터 이 건은 내부 공유 범위를 줄인다. 네 초안도 내가 직접 검토한 뒤 올린다.”

차휘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상부에 안 올리겠다는 뜻입니까?”

“올린다. 다만 한 번에 다 올리지는 않는다.”

“탁 실장님 라인 때문입니까?”

이철규는 차휘를 바라보았다.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가라앉았다. 탁강래의 이름은 부서 안에서 쉽게 입에 올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그는 대공과 해외공작 양쪽에 발을 걸친 베테랑이었고, 젊은 요원들에게는 두려움과 존경을 동시에 받는 사람이었다. 이철규에게도 그는 오래된 상관이자 스승에 가까웠다. 그런 이름을 차휘가 너무 쉽게 던졌다.

“말조심해.”

“죄송합니다.” 차휘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눈빛은 물러서지 않았다. “다만 이상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면 저쪽이 알고, 저쪽이 움직이면 위에서는 멈추라고 합니다. 우연이 반복되면 우연이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그 말은 내가 가르쳤지.”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철규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이미 식어 있었다. 그는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청사 바깥 나무 사이로 회색빛 아침이 더 밝아지고 있었다.

“의심은 필요하다. 하지만 의심을 너무 빨리 이름 붙이면, 그 순간부터 다른 가능성은 안 보인다.”

차휘는 입술을 다물었다. 이철규는 그의 성급함을 이해했다. 차휘는 현장에서 빠르고 용감했지만, 감정이 먼저 달릴 때가 있었다. 그 점이 장점이자 약점이었다. 특히 이 사건처럼 적과 아군의 경계가 흐릴 때는 더욱 위험했다.

“노민지 쪽 자료 더 붙여.” 이철규가 말했다. “재단 참석 기록, 통화 패턴, 카드 사용 내역 중 공개 합법 범위에서 확인 가능한 것부터. 무리하지 말고.”

“영장 없이 되는 선까지만 하겠습니다.”

“그래.”

차휘가 나가려던 순간, 이철규가 다시 불렀다.

“그리고 어제 강남에서 놓친 사람.”

차휘가 멈췄다.

“인상착의 다시 말해 봐.”

“사십대 중후반 남자. 키는 175 전후. 머리 짧고, 회색 코트. 한국어 발음은 자연스러웠는데, 택시 기사와 통화할 때 아주 짧게 중국어를 썼습니다. 보통화는 아니고, 북방 쪽 억양이 조금 섞인 듯했습니다.”

“사진은?”

“측면만 있습니다. 얼굴 정면은 없습니다.”

“이름은?”

“가명으로 추정되는 명함을 썼습니다. 리정후.”

이철규의 손가락이 멈췄다. “리정후?”

“아십니까?”

그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리정후. 그 이름은 2년 전 부산의 항만 물류회사 관련 보고서에서 한 번 등장한 적이 있었다. 중국계 투자 컨설턴트로 소개됐지만, 실제로는 사람과 돈이 오가는 길목마다 얼굴을 비추고 사라지는 인물. 어느 조직에도 정식으로 소속되지 않은 듯했지만, 너무 많은 조직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때는 증거 부족으로 추적이 중단됐다.

“자료 찾아서 내 책상에 올려.”

“예.”

차휘가 나간 뒤, 이철규는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모니터의 흰 화면이 그의 얼굴을 밝히고 있었다. 한중문화교류재단. 노민지. 리정후. 장천길. 단어들은 아직 하나의 문장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히 같은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는 내부망에서 오래된 파일 하나를 검색했다. 검색어는 리정후. 결과가 뜨기까지 몇 초가 걸렸다. 파일 세 개. 부산 항만 물류회사 투자 보고서, 제주 국제포럼 참석자 명단, 그리고 비공개 분류로 잠긴 문건 하나. 제목은 열람 권한 없음을 뜻하는 회색 바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는 권한 요청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멈췄다.

그 문건의 관리 부서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탁강래 실장 직속 보관.

이철규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점점 단어들이 너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탁강래는 단순한 상관이 아니었다. 그는 조직의 어두운 물길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고, 때로는 법과 원칙보다 국가의 생존을 먼저 말하는 사람이었다. 이철규는 그 방식이 늘 옳다고 믿지는 않았지만, 탁강래가 아무 이유 없이 사건을 덮는 사람이라고도 믿고 싶지 않았다.

그때 내부 전화가 울렸다.

“이철규입니다.”

“올라와.”

탁강래의 목소리였다. 짧고 낮았다. 설명은 없었다.

“지금 말씀이십니까?”

“지금.”

전화는 끊겼다.

이철규는 모니터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서를 저장했다. 저장 파일명 끝에 날짜와 시간, 그리고 작은 표시 하나를 덧붙였다. _D1. 그의 개인적 구분 방식이었다. 공개 보고 전 단계. 아직 누구에게도 전부 보여 주지 않는 문서. 그는 화면을 잠그고 일어섰다.

탁강래의 방은 같은 건물 위층 끝에 있었다. 복도를 걸어가는 동안 이철규는 유리창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았다. 피곤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문제였다. 피곤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은, 어느 순간 자기 자신에게도 피곤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시작한다.

탁강래의 비서가 문을 열어 주었다. 방 안에는 커피 향과 오래된 종이 냄새가 섞여 있었다. 탁강래는 창가 쪽에 서 있었다. 쉰 살. 짧은 머리, 두꺼운 목, 군인처럼 곧은 등. 그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정장보다 작전복이 더 어울릴 사람처럼 보였다. 책상 위에는 종이 서류가 몇 장 놓여 있었고, 그중 하나에는 한중문화교류재단이라는 글자가 보였다.

“앉아.”

이철규는 의자에 앉았다. 탁강래는 맞은편에 앉지 않고 창가에 선 채 물었다.

“재단 건, 어디까지 봤어?”

“자금 흐름과 접촉 인맥을 정리 중입니다. 단순 민간 교류로 보기 어려운 반복 접촉이 있습니다.”

“정치권?”

“여야 모두 걸쳐 있습니다. 대통민정당, 자유우국당, 참의당 주변 인사들이 섞여 있습니다. 다만 현재 가장 민감한 접점은 장천길 의원실 보좌관 노민지입니다.”

탁강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 무반응이 이철규에게는 오히려 반응처럼 느껴졌다.

“장천길 이름은 보고서에 넣지 마.”

이철규는 잠시 침묵했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아직 직접 증거가 없어.”

“직접 증거가 없다는 문장으로 넣을 수 있습니다.”

“넣지 말라면 넣지 마.”

탁강래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방 안의 공기가 단단해졌다. 이철규는 그를 바라보았다. 상관의 얼굴에는 분노도 불안도 없었다. 그래서 더 읽기 어려웠다.



“선거 기간입니다.” 탁강래가 말했다. “우리가 정치인 이름을 잘못 올리면, 그 순간부터 이 사건은 정보 사안이 아니라 정치 사안이 된다. 정치 사안이 되면 진실은 사라지고 편만 남아. 너도 알잖아.”

“알고 있습니다.”

“그럼 신중해.”

“하지만 재단이 선거판에 접근하고 있다면, 신중함이 늦장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탁강래가 처음으로 몸을 돌렸다. 그의 눈이 이철규에게 닿았다.

“철규야.”

상관이 이름을 낮게 부를 때마다 이철규는 경계했다. 탁강래가 직급이 아니라 이름을 부를 때는 대개 명령보다 무거운 말을 꺼낼 때였다.

“너는 아직 선과 점을 너무 빨리 잇는다.”

“그러라고 이 일을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우리는 선을 잇는 사람이 아니라, 잘못 이어진 선을 끊는 사람이다.”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탁강래는 책상 위 서류를 집어 들었다. “재단은 계속 봐. 리정후도 다시 확인해. 단, 장천길 이름은 공식 보고서에서 빼. 노민지는 관찰 대상으로만 둬. 체포도, 압박도, 공개 접촉도 하지 마.”

“차휘는 현장에서 감시 노출 가능성을 보고했습니다.”

“차휘는 아직 어리다.”

“보고 자체는 타당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붙어 있는 거야.”

이철규는 입을 다물었다. 탁강래는 그 침묵을 허락으로 받아들인 듯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하나 더.”

“말씀하십시오.”

“이 건을 ‘해연망’이라고 부른다며?”

이철규의 시선이 잠깐 굳었다. 그 이름은 아직 소규모 내부 메모에서만 썼다. 공식 보고에는 올리지 않았다.

“임시 코드입니다.”

“코드는 신중하게 붙여. 이름을 붙이면 실체가 생긴다. 실체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 실체에 맞춰 증거를 고르기 시작해.”

“그렇다고 이름 없는 흐름을 계속 흐름으로 둘 수는 없습니다.”

탁강래는 아주 짧게 웃었다. “그게 네 장점이고 약점이야.”

이철규는 일어섰다. “지시 사항 반영하겠습니다.”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갈 때 탁강래가 다시 말했다.

“철규야.”

이철규가 돌아섰다.

“장천길은 아직 건드리지 마.”

이번에는 이유도, 설명도 없었다. 그러나 그 말은 앞선 지시보다 훨씬 개인적으로 들렸다. 이철규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복도로 나오자 조금 전까지 고요하던 청사가 다시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어디선가 프린터가 돌아가고, 누군가 낮은 목소리로 통화를 하고, 멀리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닫혔다. 이철규는 걷지 않고 잠시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장천길은 아직 건드리지 마. 그 말이 머릿속에서 반복됐다. 정치적 신중함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또는 오래된 빚의 흔적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사무실로 돌아오자 차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출력물이 들려 있었다.

“리정후 자료입니다.”

이철규는 출력물을 받았다. 첫 장에는 2년 전 부산 항만 물류회사 투자설명회 사진이 있었다. 흐릿한 행사장 사진 한쪽에 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얼굴은 측면이었지만, 눈매와 턱선은 어젯밤 차휘가 촬영한 인물과 비슷했다.

두 번째 장은 제주 국제포럼 참석자 명단이었다. 리정후라는 이름은 없었다. 대신 다른 이름 하나가 형광펜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린웨이.

차휘가 말했다. “리정후와 같은 숙소에 묵은 기록이 있습니다. 공식 직함은 동북아지역협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 중국 쪽 학자라고 되어 있는데, 행사마다 정치권 사람들하고만 따로 만났습니다.”

이철규는 세 번째 장을 넘겼다. 사진 속 린웨이는 중년의 남자였다. 얇은 안경, 온화한 미소, 학자처럼 보이는 얼굴. 그러나 그 얼굴이 지나치게 평온해 보였다.

“이 사람이 재단 쪽 핵심입니까?” 차휘가 물었다.

“아직은 몰라.”

“탁 실장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철규는 자료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재단은 계속 보라고 했다.”

“장천길은요?”

“공식 보고서에서 빼라고 했다.”

차휘의 입꼬리가 딱딱하게 굳었다. “역시 이상합니다.”

“그 말은 두 번 하지 마.”

“하지만 선배님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시잖습니까.”

이철규는 그를 바라보았다. 차휘는 물러서지 않았다. 젊은 요원은 가끔 위험할 만큼 정직한 눈을 했다. 그래서 코드명이 설인이었다. 눈 속에서 살아남는 짐승처럼 끈질기지만, 눈보라의 방향을 가끔 자기 분노와 헷갈렸다.

“나는 아직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을 미루는 것도 판단입니다.”

“맞아. 그래서 미루는 거다.”

차휘는 더 말하지 않았다. 이철규는 린웨이의 사진을 모니터 옆에 세워 두었다. 노민지, 리정후, 린웨이. 그리고 공식 보고서에서 이름을 빼야 하는 장천길. 이 네 개의 점은 너무 빨리 하나의 선이 되려고 했다. 탁강래는 그 선을 아직 긋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미 반대편에서 선을 그어 놓고, 그 위로 사람들을 몰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오전 회의가 끝난 뒤, 이철규는 혼자 지하 기록실로 내려갔다. 기록실은 청사에서 가장 조용한 곳 중 하나였다. 오래된 기밀문서의 일부는 이미 전산화되었지만, 일정 기간 이전의 자료는 여전히 물리적 보관 절차를 거쳤다. 그는 허가된 범위 안에서 1990년대 초 러시아 극동, 중국 접경, 한반도 관련 비공개 작전 색인을 검색했다. 검색어는 직접적이지 않았다. 리정후나 린웨이 대신, 행사 경로와 지역명, 항만, 교류재단 전신으로 추정되는 단체명을 넣었다.

결과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또는 나와서는 안 되는 결과들이 회색으로 잠겨 있었다. 잠긴 파일들의 제목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류번호 일부는 남아 있었다. 그중 하나가 이철규의 눈을 붙잡았다.


BY-91.


그는 숨을 아주 얕게 들이마셨다. BY. White Night. 백야. 워싱턴의 어느 누군가가 송민희에게 건넸을지도 모를 그 단어를, 이철규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 약어를 보는 순간 그는 오래된 냄새를 맡았다. 종이, 먼지, 바닷바람, 그리고 한 번 덮인 뒤 다시 열리기를 거부하는 사건의 냄새.

파일 권한은 닫혀 있었다. 관리자는 탁강래 실장 직속 보관. 접근 사유 제출 필요.

그는 접근 요청서를 쓰지 않았다. 대신 분류번호와 시간만 수첩에 적었다. 국가정보원 요원이 수첩을 쓰는 것은 구식처럼 보였지만, 가끔 가장 오래된 방식이 가장 오래 살아남았다.

기록실에서 나올 때, 그는 복도 끝 유리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피곤해 보였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차휘가 통화를 마치고 있었다. 그는 수화기를 내려놓자마자 말했다.

“선배님, 재단 쪽 오늘 저녁 행사 하나 더 잡혔습니다.”

“무슨 행사?”

“한중 청년미래포럼 폐쇄 간담회랍니다. 장소는 강남. 공개 일정에는 없습니다. 참석 예상자 중에 정치권 보좌진 몇 명 있고, 언론 쪽도 있습니다.”

“노민지는?”

“아직 확인 중입니다.”

이철규는 잠시 생각했다. 탁강래는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장천길은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노민지는 관찰 대상으로만 두라고 했다. 그러나 관찰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오늘 저녁의 간담회는 어쩌면 재단이 단순 교류단체인지, 아니면 훨씬 조직적인 정보망인지 가늠할 수 있는 첫 번째 문일 수 있었다.

“차휘.”

“예.”

“오늘은 따라붙지 않는다.”

차휘의 얼굴에 실망이 스쳤다. “그럼 어떻게 합니까?”

“기다린다.”

“기다리기만 하면 또 놓칩니다.”

“아니. 이번엔 사람을 보는 게 아니라, 누가 나오지 않는지를 볼 거다.”

차휘는 잠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이철규는 린웨이의 사진을 가리켰다.

“중요한 회의에 항상 나오는 사람보다, 나와야 하는데 안 나오는 사람이 더 많은 걸 말할 때가 있어.”

그날 저녁, 강남의 한 빌딩 18층에서는 한중 청년미래포럼이라는 이름의 폐쇄 간담회가 열렸다. 행사장 입구에는 별다른 간판도 없었다. 참석자들은 대부분 시간차를 두고 올라갔고, 엘리베이터는 17층에서 한 번 멈춘 뒤 18층으로 올라갔다. 건물 앞 카페, 맞은편 주차장, 옆 건물 로비에서 각각 다른 사람들이 그 흐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누구도 서로를 아는 척하지 않았다.

이철규는 현장에 직접 나가지 않았다. 대신 사무실에서 차휘가 보내오는 짧은 보고를 받았다. 19시 03분, 언론사 정치부 기자 두 명 입장. 19시 11분, 지방의원 보좌진 추정 인물 입장. 19시 24분, 전직 경찰 간부 입장. 19시 37분, 노민지로 추정되는 여성 입장. 19시 51분, 리정후 미확인. 20시 08분, 린웨이 미확인.

이철규는 마지막 두 줄을 오래 보았다. 리정후도 없고, 린웨이도 없다. 그렇다면 오늘의 간담회는 핵심 회의가 아니라 노출용 회의일 가능성이 컸다. 누군가 보라고 열어 둔 문. 감시자가 따라붙으면 그 감시자만 드러나는 구조. 차휘의 어젯밤 판단은 옳았다.

20시 32분, 차휘에게서 새 메시지가 왔다.

노민지 추정 인물 18층에서 17층 비상계단 이동. 단독 아님. 회색 코트 남자 동행 가능성.

이철규의 손이 멈췄다. 회색 코트. 리정후.

곧바로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접근 불가. 동선 차단됨. 17층 복도 CCTV 사각. 건물 관리인 협조자 가능성.

그리고 세 번째 메시지.

선배님, 저쪽이 우리를 알고 있습니다.

이철규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방 안의 조명이 유난히 희게 느껴졌다. 그는 모니터에 띄워 둔 보고서 제목을 바라보았다. 한중문화교류재단. 이름은 여전히 부드럽고 깨끗했다. 문화, 교류, 청년, 미래. 좋은 단어들만 모아 놓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좋은 단어들 사이로 아주 가는 균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보고서 첫 줄을 수정했다.

‘한중문화교류재단은 단순 민간교류 단체가 아니라, 국내 정치·언론·치안 인맥을 장기적으로 접촉·분류·관리하는 외국계 영향력 네트워크일 가능성이 있음.’

문장을 쓰고 나서도 그는 한참 동안 저장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이 문장이 저장되는 순간, 사건은 더 이상 희미한 의심이 아니게 된다. 이름 없는 흐름에 이름이 붙고, 흩어진 점들은 선이 된다. 탁강래가 경고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철규는 결국 저장했다.



파일명 끝에는 새 표시를 붙였다.


_HY-1.

해연망 1차 보고.


그는 의자에 기대지 않았다. 대신 책상 위 린웨이의 사진, 노민지의 프로필, 리정후의 흐릿한 측면 사진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얼굴은 서로 닮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 방향 끝에는 아직 공식 보고서에 넣지 말라는 이름이 있었다.


장천길.


이철규는 그 이름을 문서 본문에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별도의 메모 파일 첫 줄에는 이렇게 적었다.

‘장천길을 둘러싼 의혹은 장천길 자신보다, 그를 의심하게 만드는 구조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문장을 쓰는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꼈다. 마치 어딘가 다른 곳에서, 다른 누군가가 같은 문장을 다른 방식으로 읽고 있을 것 같은 감각이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차휘가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와 분노가 함께 묻어 있었다. 그는 말없이 책상 위에 작은 봉투 하나를 올려놓았다.

“뭐지?”

“17층 비상계단 난간 밑에 붙어 있었습니다. 저희가 쓰는 위치에서만 보이는 곳입니다.”

이철규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흰 종이 한 장과 오래된 흑백사진 복사본이 들어 있었다. 사진은 낡고 흐릿했다. 1990년대 초쯤으로 보이는 항구. 외투를 입은 젊은 남자들 몇 명. 그중 한 사람의 얼굴 위에 붉은 펜으로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다.

그 얼굴은 젊은 탁강래와 닮아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짧은 영어 문장이 적혀 있었다.


White Night never ended.

(백야는 끝나지 않았다.)


이철규는 사진을 내려놓지 못했다. 차휘가 낮게 물었다.

“선배님, 백야가 뭡니까?”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그 이름을 오늘 기록실에서 처음 보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이름은 처음 본 것 같지 않았다. 너무 오래전부터 조직의 벽 안쪽에 숨어 있다가, 이제야 자신을 향해 문을 두드린 것 같았다.



그는 사진 속 젊은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탁강래. 리정후. 린웨이. 노민지. 장천길. 그리고 백야.

이상한 문화재단은 이제 더 이상 이상한 문화재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전에 묻힌 무언가가 다시 현재로 흘러들어오는 입구였다.

이철규는 천천히 사진을 봉투 안에 넣었다. 그리고 차휘에게 말했다.

“이건 보고하지 않는다.”

차휘의 눈이 커졌다. “탁 실장님께도 말입니까?”

이철규는 잠시 침묵했다. 복도 너머 어딘가에서 밤 근무자의 발소리가 지나갔다. 청사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이번 침묵은 아침과 달랐다. 누군가가 말을 끝낸 뒤의 침묵이 아니라, 아주 오래 숨겨진 말이 이제 막 시작되기 전의 침묵이었다.

“특히 탁 실장님께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