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1부 조용한 침투 (4화)

 제1부 조용한 침투

제2장 사슴눈의 보고서

제2절 코드명 해연망

새벽 네 시 오십칠 분, 남산 아래의 도시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도로 위에는 간간이 택시와 배달 오토바이만 지나갔고, 빌딩 창문들은 대부분 불을 끈 채 검은 격자처럼 서 있었다. 그러나 국정원 서울 연락분석실의 지하층은 밤과 새벽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형광등은 늘 같은 밝기로 켜져 있었고, 서버 냉각 장치의 낮은 진동음은 사람의 신경을 서서히 갈아내는 소리처럼 벽을 타고 흘렀다.

이철규는 세 번째 커피를 반쯤 남긴 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코드명 사슴눈. 그 별명은 처음엔 조롱에 가까웠다. 현장 요원치고 눈이 너무 순해 보인다는 이유였다. 누군가는 그가 심문실보다 도서관에 어울린다고 했고, 누군가는 총보다 만년필을 쥐는 게 낫겠다고 했다. 철규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다. 부드러운 인상은 때로 가장 값싼 위장막이 된다. 사람들이 경계심을 풀 때, 그들의 진짜 목소리가 나온다.


그의 앞에는 한중문화교류재단 관련 자료가 여러 층으로 펼쳐져 있었다. 공식 등기 자료, 행사 사진, 후원금 명세, 초청 연사 명단, 항공권 예약 기록, 호텔 투숙 내역, 세미나 참석자 명찰 사진, 언론 보도 캡처, 그리고 차휘가 가져온 감시 사진 몇 장. 하나하나만 놓고 보면 모두 평범했다. 민간 교류, 경제 협력, 청년 포럼, 동아시아 평화, 지방정부 간 문화 네트워크. 너무 평범해서 오히려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철규는 평범함이 반복될 때의 냄새를 알고 있었다. 수상한 조직은 대개 어설픈 비밀을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합법의 겉옷을 여러 겹 입는다. 장학재단, 문화교류회, 싱크탱크, 언론 포럼, 지방자치 연구소. 사람들은 그런 이름 앞에서 경계를 낮춘다. 특히 정치인들은 더 그렇다. 그들에게 초청장은 명예처럼 보이고, 사진 촬영은 영향력처럼 보이고, 해외 세미나는 체급을 키우는 통로처럼 보인다.

화면 한쪽에는 재단이 주최한 지난 5년간의 행사가 시간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부산 해양경제포럼, 제주 동아시아 평화청년회의, 서울 한중언론미래세미나, 칭다오 지방경제협력회, 베이징 차세대 정치지도자 비공개 라운드테이블. 이름은 제각각이었지만 참석자 구성은 이상하게 겹쳤다. 대통민정당의 젊은 정책참모, 자유우국당의 실용파 보좌진, 참의당 주변 노동정책 연구자, 전직 경찰 간부, 방송 패널, 경제지 기자, 그리고 선거 컨설턴트들.

문제는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이 하나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각자는 단순한 세미나에 한 번 참석했을 뿐이고, 인터뷰를 한 번 했을 뿐이고, 식사를 한 번 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철규의 화면 위에서는 그 한 번들이 선으로 이어졌다. 선들은 처음에는 가늘고 희미했지만, 겹치고 겹치며 하나의 그물 모양을 만들었다.

차휘가 분석실 문을 밀고 들어온 것은 다섯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그는 밤새 바깥에 있다 온 사람처럼 코트 어깨에 먼지가 묻어 있었고, 눈 밑에는 짙은 그림자가 내려앉아 있었다. 젊은 얼굴이었지만 피로가 너무 빨리 내려앉는 얼굴이었다. 코드명 설인. 처음 현장에 배치됐을 때부터 그는 지나치게 빠르고, 지나치게 확신이 강했다. 철규는 그 점이 장점이자 약점이라고 생각했다.

“못 잤냐?” 철규가 물었다.

“선배도 안 잤잖습니까.”

차휘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USB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어젯밤 자료 더 붙였습니다. 재단 쪽 행사 사진에서 빠진 인물들, 현장 CCTV로 일부 복원했습니다.”

철규는 USB를 꽂았다. 화면에 흐릿한 사진들이 떠올랐다. 호텔 로비,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 앞, 연회장 뒤편 복도. 사람들의 얼굴은 대개 측면이거나 흐릿했다. 그러나 첩보 분석에서 중요한 것은 완벽한 얼굴이 아니라 반복되는 위치였다. 같은 사람이 어디에 몇 번 나타났는가. 누구와 같은 시간대에 사라졌는가. 누구의 뒤에서,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는가.

“이 사람.” 차휘가 화면 하나를 가리켰다. “리정후라는 이름으로 입국했습니다. 중국계 캐나다인 사업가. 공식적으로는 문화 콘텐츠 투자자입니다. 그런데 출입국 기록을 보면 이상합니다. 행사 하루 전 들어와서 행사 끝난 날 나가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항상 이틀 먼저 들어오고, 사흘 늦게 나갑니다.”

철규는 사진을 확대했다. 사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남자. 안경, 회색 코트, 평범한 여행가방. 그러나 걸음걸이가 느슨하지 않았다. 그는 호텔 로비를 지나며 누구에게도 시선을 오래 주지 않았고, 카메라 위치를 피하지도 않았다. 일부러 평범하게 찍히는 사람의 태도였다.

“행사 전후로 만난 사람은?”

“공식 일정엔 없습니다. 비공식으로는 있습니다.”

차휘가 다른 파일을 열었다. 서울 강남의 중식당, 여의도의 호텔 바, 종로의 사무실 건물. 리정후는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인물들을 만났다. 대통민정당 정책위원회 소속 보좌관, 자유우국당 중진 의원실 비서관, 전직 경찰 정보과 간부, 방송사 외교안보 전문 패널, 그리고 장천길 의원실의 노민지.

철규의 시선이 마지막 이름에 멈췄다. “시간대는?”

“총선 예비후보 등록 직전입니다. 그리고 두 달 뒤에 한 번 더 만났습니다.”

“장소는?”

“공식 행사는 재단 세미나장. 두 번째는 호텔 라운지입니다. 노민지 쪽에서 먼저 들어갔고, 리정후가 십이 분 뒤에 합류했습니다. 대화 시간은 사십사 분. 녹음은 없습니다.”

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감시 기록에서 사십사 분은 짧지도 길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친목이라 하기엔 길고, 거래라 하기엔 애매했다. 첩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늘 애매함이었다. 명확한 배신자는 잡으면 된다. 그러나 애매한 접촉은 사람과 조직을 오래 병들게 한다.

차휘는 책상 맞은편에 기대섰다. “노민지, 올립니까?”

“아직.”

“왜요?”

“접촉이 곧 포섭은 아니야.”

“그 말 때문에 놓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철규는 차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말 때문에 사람 하나 인생을 망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차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눈빛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늘 결론을 빨리 원했다. 적이면 적, 아군이면 아군. 하지만 철규가 겪어 온 현장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포섭된 줄 모르고 포섭된다. 어떤 사람은 정보를 얻는다고 믿으며 정보를 내준다. 어떤 사람은 배신할 의도가 없었는데, 어느 날 돌이킬 수 없는 선을 이미 넘어 버린 뒤에야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깨닫는다.

철규는 화면을 넘겼다. 이번에는 재단의 후원 구조였다. 합법 기부금, 연구 용역, 출판 지원, 행사 대행비, 강연료, 자문비. 돈은 여러 이름으로 갈라져 흘렀고, 흘러간 뒤에는 다시 작은 계좌들로 나뉘었다. 어느 한 계좌도 지나치게 크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조심스럽게 작았다. 작은 돈은 사람의 양심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지 않아 보이지만, 관계를 만들기에는 충분하다. 처음엔 교통비, 다음엔 원고료, 그다음엔 자문료, 마지막엔 부탁이 온다. 사람들은 돈을 받은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어느 날 그 관계가 빚이 된다.

“재단 이름으로 직접 나간 돈보다, 재단 행사를 대행한 업체 쪽 흐름이 더 큽니다.” 차휘가 말했다. “행사 대행사 세 곳, 번역회사 한 곳, 여론조사업체 한 곳. 전부 다른 회사처럼 보이는데 대표나 감사가 서로 연결됩니다. 그리고 이 회사들 중 하나가 자유우국당 경선 컨설팅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장천길 쪽?”

“아닙니다. 한도윤 쪽입니다.”

철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화면 속 선들이 다시 모양을 바꾸었다. 처음엔 장천길 주변으로 모이는 것처럼 보였던 선들 중 일부가 한도윤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정치는 언제나 겉의 적과 속의 적이 다르다. 장천길을 공격하는 정보가 외부에서 흘러나온다면, 그 정보를 가장 잘 이용할 사람은 같은 당의 경쟁자일 수 있다.



“이름이 필요합니다.” 차휘가 말했다.

“무슨 이름?”

“이 네트워크요. 보고서에 계속 ‘한중문화교류재단 관련 외곽 인맥망’이라고 쓰기엔 너무 길잖습니까.”

철규는 피식 웃었다. “네가 작전명 짓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취미가 아니라 필요입니다. 이름이 붙어야 사람들이 봅니다. 이름이 없으면 사건이 아니라 자료 뭉치로 남습니다.”

그 말은 맞았다. 정보기관의 보고서에서 이름은 단순한 표지가 아니다. 이름은 현상을 하나의 대상으로 묶는 행위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흩어져 있던 점들은 조직이 되고, 우연처럼 보이던 접촉들은 패턴이 된다. 그러나 이름은 동시에 위험하다. 너무 빨리 이름을 붙이면, 이름에 맞춰 증거를 해석하게 된다.

철규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재단 로고는 푸른색 물결과 흰 갈매기 모양으로 되어 있었다. 해협을 건너는 새, 바다 위의 인연, 평화로운 교류. 그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러나 철규에게 그 로고는 갈매기보다 그물처럼 보였다. 물 위에 떠 있는 가벼운 새가 아니라, 물밑에서 조용히 조여 오는 그물.

“해연망.”

차휘가 되물었다. “해연망이요?”

“바다를 건너 인연을 만든다는 뜻으로 보일 수도 있고, 바다 위를 덮는 그물이라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지.”

차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코드명 해연망.”

철규는 새 보고서 파일을 열었다. 제목란에 천천히 입력했다.

국내 정치권 외곽 접촉망 분석 보고 — 코드명: 해연망

커서가 제목 끝에서 깜박였다. 그 작은 깜박임이 이상하게 무겁게 느껴졌다. 이제 이것은 단순한 문화재단 검토가 아니었다. 이름을 붙인 이상, 조직은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조직이 움직이면, 누군가는 반드시 그 움직임을 눈치챈다.

보고서 첫 문장은 오래 걸렸다. 철규는 한참 동안 빈 문서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적었다.

‘해당 네트워크는 공개 문화교류 활동을 표면으로 하나, 실제로는 한국 내 정치·언론·치안·선거 자문 인력을 장기적으로 관찰 및 접촉하는 구조를 보인다.’

그는 문장을 지웠다. ‘관찰 및 접촉’이라는 표현이 너무 약했다. 다시 썼다.

‘해당 네트워크는 공개 문화교류 활동을 표면으로 하나, 실제로는 한국 내 정치·언론·치안·선거 자문 인력을 장기적으로 식별, 분류, 접근하는 구조를 보인다.’

이번에는 지우지 않았다. 식별, 분류, 접근. 포섭이라는 단어는 아직 쓰지 않았다. 그 단어는 결정적 증거가 있을 때만 써야 했다. 하지만 철규의 손끝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접근이 아니다. 누군가는 한국 정치의 약한 부위를 아주 오래전부터 만져 보고 있었다.

차휘는 뒤쪽 화이트보드로 가서 인물 이름들을 적기 시작했다. 장천길, 노민지, 한도윤, 리정후, 린웨이, 문석표, 권유라. 그리고 각 이름 사이에 선을 그었다. 선은 처음엔 직선이었지만 금세 복잡해졌다. 누가 누구를 직접 만났고, 누가 같은 행사에 있었고, 누가 같은 업체를 통해 돈을 받았고, 누가 같은 기사에 인용되었는지. 차휘는 이름을 쓰다가 잠시 멈췄다.

“선배.”

“왜.”

“이거, 장천길을 겨냥한 겁니까? 아니면 장천길을 이용하는 겁니까?”

철규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이야말로 보고서 전체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 나온 자료만 보면 장천길은 의심스러웠다. 그의 보좌관은 재단 핵심 인물과 접촉했고, 그의 과거에는 러시아 관련 빈칸이 있었고, 그의 정치적 위치는 양쪽 모두에게 이용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장천길은 너무 잘 보이는 곳에 놓여 있었다. 너무 많은 단서가 그를 향하고 있었다. 첩보 세계에서 너무 선명한 그림은 가끔 누군가 일부러 그린 그림이다.

“둘 다일 수 있다.” 철규가 말했다. “처음엔 이용하려 했고, 안 되면 겨냥하는 식.”

“그럼 장천길은 피해자입니까?”

“피해자라는 말도 아직 일러.”

“그럼 뭡니까?”

철규는 모니터 속 장천길 사진을 바라보았다. 의원실 공식 프로필 사진. 적당한 미소, 적당한 신뢰감, 적당한 거리감. 정치인의 얼굴은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완성된다. 사진 한 장만으로 그 사람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때로는 사진 속 빈 표정이 더 많은 것을 말한다.

“판 위의 말.”

철규가 낮게 말했다. “아직은.”

그때 분석실 전화가 울렸다. 내부 직통선이었다. 새벽 시간에 분석실로 직접 걸려 오는 전화는 대개 좋은 소식이 아니다. 철규가 수화기를 들자, 당직 요원의 딱딱한 목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탁 실장님이 바로 올라오시랍니다.”

“지금?”

“네. 보고서 초안 들고 오라고 하셨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철규는 차휘를 바라보았다. 차휘의 얼굴에도 같은 의문이 떠올라 있었다. 아직 보고서 초안은 내부망에 올리지 않았다. 제목을 입력하고 몇 문장 쓴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탁강래는 벌써 알고 있었다.

“누가 말했을까요?” 차휘가 물었다.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지.”

철규는 파일을 저장하지 않고 화면을 잠갔다. USB는 뽑아 안쪽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출력하지 않은 보고서 대신 작은 수첩만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휘가 따라오려 하자 철규는 고개를 저었다.

“넌 여기 있어. 내가 없는 동안 누가 이 방에 접근하는지 봐.”

“내부 감시하라는 겁니까?”

“아니.” 철규는 문을 열며 말했다. “문이 저절로 열리는지 보라는 거다.”

탁강래의 사무실은 같은 건물 안에 있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달랐다. 분석실이 냉각 장치와 모니터의 공간이라면, 탁강래의 방은 종이와 침묵의 공간이었다. 벽에는 오래된 한반도 지도가 걸려 있었고, 책장에는 공개 보고서와 비공개 자료철이 뒤섞여 꽂혀 있었다. 창은 없었다. 지하 사무실에 창이 있을 리 없었지만, 그 방에서는 유독 그 사실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탁강래는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쉰 살. 머리카락에는 흰빛이 조금 섞였고, 표정은 늘 감정을 절반쯤 덜어낸 듯했다. 그는 좋은 상관처럼 보일 때도 있었고, 오래된 심문관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철규에게 탁강래는 둘 다였다. 현장을 가르쳐 준 사람, 그리고 절대로 모든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

“보고서.” 탁강래가 손을 내밀었다.

철규는 빈손을 보였다. “아직 초안입니다.”

탁강래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초안이라도 가져오라고 했을 텐데.”

“초안이 아직 문서가 아닙니다. 생각에 가깝습니다.”

탁강래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철규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는 꾸짖음보다 확인이 많았다. 마치 철규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재려는 사람처럼.

“이철규.”

“예.”

“문화재단 건은 확대하지 마라.”

철규는 이미 예상한 말이었지만, 실제로 듣자 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유가 뭡니까?”

“선거철이다.”

“그래서 더 봐야 합니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탁강래는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만년필을 손끝으로 돌렸다. 그의 손은 안정돼 있었고, 목소리도 흔들리지 않았다.

“국정원이 선거판에 손댄다는 인상이 생기면 끝이다. 네가 무슨 의도로 했든, 밖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정치권은 우리를 칼로 쓰고 싶어 하고, 언론은 우리가 칼을 뽑는 순간 피 냄새를 맡는다. 그걸 모를 나이는 아니지.”

“알기 때문에 말씀드립니다.” 철규가 답했다. “누군가 이미 선거판에 손을 대고 있습니다.”

탁강래는 말없이 그를 보았다.

“재단은 단순한 민간교류 조직이 아닙니다. 정치권, 언론, 경찰, 선거 컨설팅 쪽 인물을 장기적으로 식별하고 접근했습니다. 돈도 작게, 관계도 얕게, 하지만 넓게 깔았습니다. 이건 선거 하나를 위한 작업이 아닙니다. 더 오래된 겁니다.”

“증거는?”

“접촉망, 자금 흐름, 행사 반복성, 비공식 회동 기록.”

“포섭 증거는?”

철규는 잠시 멈췄다. “아직 없습니다.”

“그럼 보고서에 포섭이라고 쓰지 마라.”

“그래서 안 썼습니다.”

탁강래의 눈빛이 처음으로 아주 작게 변했다. “제목은?”

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이 대답이 되었다.

“벌써 이름을 붙였군.”

“코드명 해연망입니다.”

탁강래는 만년필 돌리던 손을 멈췄다. 그 짧은 정지가 철규의 눈에 들어왔다. 너무 미세한 반응이었지만, 탁강래 같은 사람에게는 미세함이 곧 균열이었다.

“누가 지었나?”

“제가 지었습니다.”

“왜 하필 해연망이지?”

“재단이 쓰는 말입니다. 바다를 건너 인연을 잇는다는 뜻. 하지만 제 눈엔 그물로 보입니다.”

탁강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서랍을 열어 얇은 파일 하나를 꺼냈다. 표지에는 아무 제목도 없었다. 그는 파일을 열지 않은 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네가 보는 그물은 처음 생긴 게 아닐 수 있다.”

철규는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는 것을 느꼈다. “무슨 뜻입니까?”

“동아시아에서 문화교류라는 이름으로 사람을 분류하는 일은 오래됐다. 중국만 하는 것도 아니고, 미국만 안 하는 것도 아니고, 러시아나 일본이라고 손 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정보전은 총성이 없는 대신 초청장이 있다.”

“그럼 더더욱 봐야 합니다.”

“네가 보고 싶은 것과 조직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은 다르다.”

그 말은 경고였다. 그러나 철규는 그 경고 뒤에 숨어 있는 다른 말을 들었다. 탁강래는 ‘그런 일은 없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됐다’고 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장천길 의원 이름은 보고서에서 빼라.”

철규는 눈을 들었다. “왜입니까?”

“현직 의원이다. 선거 중이다. 아직 직접 증거가 없다.”

“노민지는 장천길 의원실 보좌관입니다.”

“노민지를 쓰면 된다. 장천길은 빼.”

“그렇게 하면 구조가 왜곡됩니다.”

“그렇게 안 하면 네가 왜곡됐다고 공격받는다.”

탁강래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단했다. 철규는 그를 바라보며 천천히 물었다.

“실장님은 장천길을 보호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장천길 이름이 나오면 안 되는 다른 이유가 있으신 겁니까?”



방 안의 공기가 한순간 차가워졌다. 탁강래의 얼굴에는 분노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아무 감정도 없었다. 철규는 그 무표정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질문이 선을 넘는군.”

“답은 선 안에 있습니까?”

탁강래는 파일 위에 손을 얹었다. “이철규. 네 장점은 의심이 많다는 거다. 단점은 네 의심이 늘 옳다고 믿기 시작했다는 거고.”

철규는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제 의심보다 기록을 믿습니다.”

“기록은 사람이 만든다.”

“그래서 기록을 만든 사람을 봅니다.”

탁강래의 눈가가 아주 희미하게 굳었다. 그 순간 철규는 확신했다. 백야. 장천길. 해연망. 아직 서로 다른 단어처럼 보였던 것들이 탁강래의 침묵 속에서 어딘가 이어지고 있었다.

탁강래는 파일을 다시 서랍에 넣었다. “보고서는 내게 먼저 올려라. 내부 공유 금지. 차휘에게도 범위를 제한해.”

“차휘는 현장 담당입니다.”

“그래서 제한하라는 거다. 현장 요원은 가끔 자신이 본 것을 전체라고 착각한다.”

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탁강래가 덧붙였다. “리정후는 건드리지 마라.”

이번에는 철규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리정후 이름은 아직 보고드린 적 없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정면으로 부딪혔다. 탁강래는 아주 짧게 침묵했다. 그 짧은 침묵이 대답이었다. 철규는 이제 알았다. 분석실 밖에서도 누군가 그들의 화면을 보고 있었다. 아니면 탁강래가 그보다 훨씬 전부터 리정후를 알고 있었거나.

“나가 봐.” 탁강래가 말했다.

철규는 더 묻지 않았다. 질문은 때로 대답보다 위험하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왔다. 복도는 길고 조용했다. 천장 형광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바닥에 빛을 떨어뜨렸다. 철규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지만, 머릿속에서는 방금 들은 말들이 빠르게 정렬되고 있었다.

장천길은 빼라.

리정후는 건드리지 마라.

해연망은 확대하지 마라.

그중 가장 위험한 문장은 마지막이 아니었다. 리정후. 보고하지 않은 이름을 탁강래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 그것은 탁강래가 내부 감시망을 돌리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었고, 리정후가 오래전부터 관리 대상이었다는 뜻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문제였다.

분석실로 돌아오자 차휘가 문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

“누가 왔었나?” 철규가 물었다.

“예.”

“누구.”

“시설관리팀이라고 했습니다. 냉각 장치 점검이라면서요.”

“이 시간에?”

“그래서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신분 확인은?”

“했습니다. 진짜 시설관리팀 직원은 맞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자기가 왜 여기 배정됐는지 모르고 있었다는 겁니다. 시스템에 작업 요청이 들어와 있어서 왔답니다.”

철규는 천천히 분석실 안으로 들어갔다. 화면은 잠겨 있었고, 책상 위는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리에 앉기 전, 천장 모서리의 작은 점검구를 바라보았다. 정보기관 건물 안에서 문은 가장 느린 통로다. 진짜로 들어오고 싶은 사람은 문을 고집하지 않는다.



“작업 요청 기록 따.”

“이미 땄습니다.” 차휘가 USB 하나를 다시 내밀었다. “요청자는 내부 시스템상 공란입니다.”

철규는 피곤한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공란. 누군가 자신의 흔적을 지웠다는 뜻이 아니라, 흔적을 지울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보고서는 어떻게 됐습니까?” 차휘가 물었다.

“해연망은 내부 공유 금지.”

“탁 실장님 지시입니까?”

“그래.”

차휘의 입술이 비뚤어졌다. “역시 덮는군요.”

“아직 그렇게 단정하지 마.”

“선배는 항상 그렇게 말합니다. 단정하지 말자, 기다리자, 더 보자. 그런데 기다리는 동안 상대는 자료 지우고 사람 빼냅니다.”

철규는 그 말에 바로 반박하지 못했다. 차휘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부분적으로 맞았기 때문이었다. 정보전에서 신중함은 필요하지만, 신중함이 늦음으로 바뀌는 순간 이미 패배다. 그러나 빠름이 분노와 결합하면 그 역시 패배다.

“그래서 더 정확해야 한다.” 철규가 말했다.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고 뛰면, 우리가 상대 작전의 일부가 된다.”

차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화이트보드에 적힌 이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해연망’이라는 글자를 맨 위에 크게 썼다.

“그럼 이건 뭡니까?”

“이름.”

“아니요. 적입니까, 현상입니까?”

철규는 잠시 생각했다. “둘 다 아니야.”

“그럼요?”

“문이다.”

차휘가 돌아보았다.

“해연망은 끝이 아니라 입구야. 이 문을 열면 뒤에 다른 방이 나올 거다. 그 방에 누가 있는지가 중요해.”

그때 철규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개인 휴대전화가 아니라 현장 연락용 보안 단말이었다. 발신자는 표시되지 않았다. 단말 화면에는 짧은 파일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이미지 파일. 발신 경로는 세 번 우회되어 있었고, 마지막 서버는 해외 무료 클라우드로 위장돼 있었다. 초보자가 할 수 있는 방식은 아니었다.

철규는 파일을 열었다. 사진은 흑백이었다. 오래된 필름을 스캔한 것처럼 입자가 거칠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남자 세 명이 서 있었다. 배경은 눈 덮인 항구 같았다. 러시아어 간판이 흐릿하게 보였고, 멀리 낡은 화물선이 정박해 있었다. 사진 왼쪽의 남자는 젊은 시절의 탁강래처럼 보였다. 오른쪽의 남자는 얼굴 절반이 그림자에 가려 있었지만, 턱선과 눈매가 장천길을 닮아 있었다. 가운데의 남자는 낯설었다. 그러나 철규는 그 남자의 손에 들린 서류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서류 상단에 흐릿한 영문 약자가 찍혀 있었다.


BY-91


사진 아래에는 문장이 하나 붙어 있었다.


White Night never ended


차휘가 옆에서 숨을 삼켰다. “백야…”


철규는 사진을 확대하지 않았다. 오래된 사진은 확대할수록 진실이 선명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상만 커진다. 그는 화면을 바라본 채 한참 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탁강래는 장천길을 보고서에서 빼라고 했다. 리정후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는 백야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우연히 같은 날 일어날 가능성은 낮았다.

철규는 단말을 끄지 않고 차휘에게 말했다.

“이 파일, 우리 둘 말고 아무도 모르게 복제해.”

“내부망에는요?”

“올리지 마.”

“탁 실장님께도?”

철규는 대답하기까지 아주 짧은 시간이 걸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자신이 방금 어떤 선을 넘었는지 알았다. 조직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더 어려운 것은, 조직을 믿지 못하게 되는 첫 순간을 인정하는 일이다.

“아직은.”

차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보다 흥분이 더 많았다. 철규는 그 점이 걱정스러웠다.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사람은 자신이 정의롭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리고 정의롭다는 확신은 때로 가장 위험한 폭력이 된다.

철규는 다시 화이트보드를 바라보았다. 해연망이라는 글자 아래로 이름들이 매달려 있었다. 장천길, 노민지, 한도윤, 리정후, 린웨이, 문석표, 권유라. 그리고 아직 쓰지 않은 이름 하나가 있었다.

탁강래.

그는 marker를 들었지만, 그 이름을 쓰지 않았다. 대신 화이트보드 맨 아래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다. 지금은 이름보다 점이 맞았다. 아직 선을 그을 수 없는 의심. 아직 보고서에 쓸 수 없는 불신. 아직 적이라 부를 수 없는 사람.

새벽은 천천히 밝아오고 있었다. 지하 분석실에 창은 없었지만, 철규는 이상하게도 바깥 하늘이 희미하게 푸르러지고 있음을 느꼈다. 서울의 아침은 곧 시작될 것이다. 정치인들은 출근길 라디오에 목소리를 실을 것이고, 기자들은 아침 회의에서 새로운 프레임을 정할 것이며, 보좌관들은 후보의 동선을 다시 짤 것이다. 시민들은 커피를 들고 지하철에 오르며 오늘의 첫 뉴스를 볼 것이다. 그 뉴스들 가운데 어느 것도 아직 해연망이라는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름은 생겼다.

그리고 이름이 생긴 순간, 그물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