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1부 조용한 침투 (9화)

 제1부 조용한 침투

제5장 회색 자금

제1절 이상한 후원회


장천길 의원실의 아침은 전날 밤 끝나지 않은 뉴스의 연장선 위에서 시작되었다.

국회 의원회관 7층 복도는 평소보다 일찍 붐볐다. 보좌진들이 종이컵을 든 채 빠르게 오갔고, 출입기자 몇 명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휴대전화를 귀에 붙이고 낮은 목소리로 속보를 확인했다. 복도 끝 창문으로 겨울 햇빛이 비스듬히 들어왔지만, 그 빛은 유리문 안쪽에 쌓인 긴장을 녹이지 못했다. 장천길 의원실 앞에는 밤새 배달된 꽃바구니 두 개와 익명의 항의 택배 세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하나는 “응원합니다”라는 리본을 달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 글자도 없는 회색 상자였다. 정치판에서 꽃과 협박은 가끔 같은 시간에 도착했다.



지명길은 오전 6시 40분에 의원실 문을 열었다. 보좌진 중 가장 먼저였다. 어젯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는데도 몸은 저절로 움직였다.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고, 팩스 수신함을 확인하고, 언론 모니터링 화면을 켰다. 벽걸이 TV에는 이미 송민희의 기사를 인용한 아침 시사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진행자는 ‘변절자 논란’이라는 큼직한 자막 아래서 장천길의 과거 운동권 경력과 러시아 방문 기록을 한 문장으로 엮고 있었다.

지명길은 리모컨을 들어 소리를 줄였다. 화면 속 패널들은 장천길이라는 인간을 아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들 중 누구도 장천길과 마주 앉아 긴 대화를 나눈 적은 없을 것이다. 선거판에서는 사실보다 익숙한 얼굴과 큰 목소리가 먼저 도착했다. 그는 그것을 알면서도 매번 분노했다. 그리고 분노하는 자신이 아직 너무 순진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밤새 쌓인 후원회 입금 내역이 출력되어 있었다. 전날 송민희의 기사가 나간 뒤, 장천길 후원회 계좌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소액 후원이 들어왔다. 지지자들이 결집한 것이다. 정치인은 공격받을 때 돈을 잃기도 하지만, 때로는 돈을 얻는다. 분노한 지지자는 댓글보다 먼저 만 원을 보내고, 실망한 지지자는 침묵보다 먼저 후원을 끊는다. 지명길은 그런 흐름을 여러 번 보았다.

처음에는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공격이 세질수록 지지층이 뭉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숫자를 오래 들여다보는 사람답게, 기쁨보다 먼저 패턴을 보았다. 후원금 입금 시각이 이상했다. 새벽 두 시 십삼 분부터 두 시 사십칠 분까지, 비슷한 금액의 후원이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들어왔다. 이름은 모두 달랐다. 금액도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29,000원, 39,000원, 49,000원, 59,000원. 사람이 직접 보낸 것처럼 보이게 하려는 듯 조금씩 흔들려 있었다. 그러나 흔들림 자체가 너무 규칙적이었다.

지명길은 모니터 앞으로 다가가 후원회 관리 프로그램을 열었다. 로그인 화면이 뜨고, 보안 인증 창이 한 번 더 떴다. 그는 손가락을 문지르며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프로그램 안에는 후원자 이름, 연락처, 주소, 입금액, 영수증 신청 여부, 결제 경로가 정리되어 있었다. 정치자금은 늘 깨끗하게 기록되어야 했다. 깨끗한 기록이 정치인을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치인을 죽일 때도 사람들은 가장 먼저 기록을 뒤졌다.

그는 전날 오후 6시 이후 입금 내역을 별도 파일로 내려받았다. 엑셀 화면에 숫자와 이름이 빽빽하게 펼쳐졌다. 지명길은 필터를 걸고, 금액순으로 정렬하고, 다시 시간순으로 돌렸다. 그리고 조금씩 얼굴이 굳어졌다.

이상한 이름들이 있었다. 흔한 이름이었지만, 너무 흔해서 오히려 비현실적이었다. 김성호가 세 명, 이민수가 네 명, 박정환이 다섯 명. 주소는 서울, 경기, 인천, 부산으로 흩어져 있었지만 상세 주소의 구조가 비슷했다. 오피스텔 이름은 다르지만 호수 끝자리가 반복되었고, 이메일 아이디는 서로 다른데 생성 규칙이 닮아 있었다. ‘river’, ‘east’, ‘blue’, ‘line’, ‘winter’ 같은 단어가 반복적으로 섞여 있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가 곧바로 다시 몸을 세웠다. 우연일 수 있었다. 우연이어야 했다. 선거철 후원자 명단은 원래 어지럽다. 지지자들이 단체방에서 링크를 공유하면 비슷한 시간대에 후원이 몰릴 수 있고, 같은 직장 사람들은 같은 건물 주소를 적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종류의 몰림과 달랐다. 인간적인 산만함이 부족했다. 누군가가 산만함을 흉내 내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노민지가 들어왔다. 그녀는 아직 코트를 벗지 않은 채였다.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여 있었고, 손에는 태블릿과 커피가 들려 있었다. 밤새 기사와 방송을 모니터링한 흔적이 눈 밑에 옅게 남아 있었지만, 표정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노민지는 지명길을 보자마자 TV 화면부터 확인했다.

“소리 왜 껐어요?”

“듣기 싫어서요.”

“듣기 싫은 걸 들어야 이겨요.”

그녀는 리모컨을 집어 소리를 조금 키웠다. 화면 속 권유라가 말했다. “장천길 의원은 보수 정당 안의 개혁파인지, 아니면 정체성을 바꿔 살아남은 정치인인지 스스로 설명해야 합니다.”

지명길은 짧게 숨을 내쉬었다. “저 사람은 어제까지 의원님을 별로 언급하지도 않았잖아요.”

“언급할 이유가 생긴 거죠.”

“누가 이유를 만들어 준 건 아닐까요?”

노민지가 그제야 지명길의 모니터를 보았다. “뭐 보고 있어요?”

“후원회 입금 내역요.”

“늘어난 거 알아요. 어젯밤에 후원 링크가 지지자 단체방에 많이 돌았대요.”

“그중 일부가 이상합니다.”

노민지는 커피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다가왔다. 그녀의 시선이 화면 위를 빠르게 훑었다. 정치 컨설턴트 출신답게 그녀는 숫자를 감정 없이 보았다. 한 줄씩 읽는 것이 아니라 패턴 전체를 한꺼번에 보는 사람의 눈이었다. 몇 초 뒤 그녀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금액대가 낮네요.”

“일부러 낮춘 것 같습니다.”

“낮추면 뭐가 좋죠?”

“눈에 덜 띄죠. 큰돈이면 바로 검토 대상이 되니까요. 그런데 이건…”

지명길은 마우스로 몇 줄을 선택했다. “이 사람들, 입금 시간이 이상해요. 평균 삼십팔 초 간격입니다. 사람이 단체로 후원해도 이렇게까지 일정하진 않아요. 그리고 주소가 다 다른데, 결제 경로 메모에 같은 식별 코드가 붙어 있습니다.”

노민지는 화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식별 코드?”

“결제대행사 내부 로그에 남는 값입니다. 후원회 프로그램에 원래 안 보이는데, 회계팀 백업 파일에는 남아 있어요. 같은 단말인지, 같은 네트워크인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같은 방식으로 들어온 돈입니다.”

노민지는 아무 말 없이 커피 컵 뚜껑을 만졌다. 그녀의 손톱이 플라스틱 가장자리를 조용히 두드렸다. 지명길은 그 습관을 알았다. 노민지는 계산할 때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몇 건이에요?”

“지금 확인한 것만 백마흔세 건. 금액 합치면 크진 않습니다.”

“크지 않으면 정치자금법상 치명적이진 않겠네요.”

“문제는 금액이 아니에요.”

“알아요.”

노민지의 대답은 빠르고 낮았다. 그녀도 이미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작은 돈은 정치인을 사지 못한다. 그러나 작은 돈도 정치인을 더럽힐 수는 있다. 특히 그 돈이 외국계 재단, 위장 회사, 가짜 신원과 조금이라도 연결되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돈의 액수가 아니라 돈이 들어온 방향이 문제가 된다. 누군가 장천길에게 의심스러운 돈을 보냈고, 그 사실을 적절한 시점에 터뜨린다면, 장천길은 해명하기도 전에 더러운 정치인으로 보일 수 있었다.

노민지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일단 이 파일 외부로 나가지 않게 해요.”

“당연하죠.”

“그리고 후원회 회계 담당한테는 말하지 말고.”

지명길이 그녀를 보았다. “왜요?”

“아직 내부에 누구까지 알고 있는지 모르니까요.”

“회계 담당자도 의심하자는 겁니까?”

“지금은 믿는 사람 숫자를 줄이는 게 맞아요.”

그 말은 현실적이었다. 그래서 더 차가웠다. 지명길은 입을 다물었다. 노민지는 늘 상황을 빠르게 파악했고, 필요한 결정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 능력 때문에 장천길은 그녀를 곁에 두었다. 그러나 지명길은 가끔 그 빠름이 무서웠다. 노민지는 어떤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사람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언제든지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민지 선배.”

“말해요.”

“어젯밤에 전화 온 사람, 누구였습니까?”

노민지의 손이 멈췄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지명길은 보았다.

“무슨 전화요?”

“지하 주차장에서 받았던 전화요. 리정후라는 이름, 제가 들었습니다.”

노민지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황이 없었다. 오히려 지명길이 그 이름을 꺼낼 것을 예상했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남의 통화를 엿듣는 건 좋은 습관이 아니에요.”

“장천길 의원님 주변에서 이상한 이름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강윤호, 백야, 리정후. 이제 후원회 명단까지 이렇습니다. 그런데 선배는 매번 알고도 말하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노민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낮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한숨에 가까웠다.

“명길 씨는 아직도 정치가 사실을 밝히면 정리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죠.”

“그럼 뭡니까?”

“정치는 사실이 드러나는 순서를 정하는 일이에요.”

지명길은 그 말을 싫어했다. 너무 배철중 같은 말이었다. 그는 노민지가 기자가 아니라 정치 참모라는 사실을 떠올렸지만, 그래도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 진실의 순서를 정하는 사람이 결국 진실의 일부를 죽이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리정후가 누굽니까?”

노민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창밖을 보았다. 의원회관 너머로 국회 본청 지붕이 보였고, 그 뒤로 흐린 하늘이 낮게 깔려 있었다. 그녀는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국에서 알던 사람입니다.”

“한중문화교류재단과 관련 있습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어요.”

“그게 대답입니까?”

“지금 할 수 있는 대답입니다.”

지명길은 자리에서 일어날 뻔했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이 싸움은 지금 이 자리에서 끝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그는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수많은 이름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 이름들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선의인지 악의인지 알 수 없었다. 정치에서 사람의 이름은 때로 사람보다 먼저 움직였다. 이름은 계좌를 지나고, 기사에 박히고, 수사 기록에 남고, 결국 사람을 끌고 갔다.

그때 후원회 대표 전화가 울렸다. 지명길이 받으려 하자 노민지가 손을 들어 말렸다. 그러나 이미 그의 손은 수화기를 들고 있었다.

“장천길 의원 후원회입니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지하철 안내 방송 같은 웅웅거림이 멀게 들렸다. 그리고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돈이 들어온 방향을 보지 마십시오.”

지명길의 등줄기가 굳었다.

“누구십니까?”

“돈이 빠져나갈 방향을 보십시오.”

전화는 곧바로 끊겼다.

지명길은 수화기를 든 채 몇 초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노민지는 그의 얼굴을 보고 상황을 알아차린 듯했다.

“뭐예요?”

“누가 후원회 돈 얘기를 했습니다.”

“뭐라고요?”

“들어온 방향 말고 빠져나갈 방향을 보라고요.”

노민지는 곧바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아침 햇빛이 가늘게 잘려 들어오던 의원실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TV에서는 여전히 장천길 관련 토론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이제 두 사람 모두 그쪽을 보지 않았다.

“후원회 지출 내역도 열어 봐요.”

“아직 마감 전이라 정리 안 됐습니다.”

“초안이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지명길은 별도 회계 폴더를 열었다. 선거사무소 임차료, 홍보물 제작비, 여론조사 비용, 차량 임대료, 문자 발송비, 온라인 광고비, 자원봉사자 식비. 익숙한 항목들이 줄지어 있었다. 그는 최근 일주일 지출 내역을 열고, 공급업체명 순으로 정렬했다. 처음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업체들은 모두 선거판에서 흔히 보는 이름들이었다. 기획사, 인쇄소, 여론조사 업체, 데이터 분석 회사.

그러나 노민지가 한 항목을 가리켰다.

“이거.”

‘청해전략연구소.’

금액은 크지 않았다. 선거 메시지 분석 자문료 명목이었다. 지명길은 눈살을 찌푸렸다.

“처음 보는 곳인데요.”

“나도 처음 봐요.”

“누가 계약했죠?”

파일에는 담당자 이름이 비어 있었다. 계약서 스캔본도 없었다. 대신 세금계산서 예정 메모만 있었다. 지명길은 검색창에 업체명을 입력했다. 포털에는 거의 정보가 없었다. 오래된 블로그 글 하나, 폐쇄된 홈페이지 흔적 하나, 그리고 한중문화교류재단이 주최한 세미나 후원 기관 목록에 같은 이름이 작게 남아 있었다.

노민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확실한 긴장이 보였다.

“청해…”

“아는 이름입니까?”

“아니요.”

“방금 표정은 아는 표정이었습니다.”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태블릿으로 무언가를 검색했다. 몇 번의 터치 뒤 그녀는 화면을 확대했다. 세미나 사진이었다. 배경 현수막에는 ‘동북아 해양질서와 민간교류의 미래’라는 제목이 걸려 있었다. 행사장 맨 뒤쪽, 흐릿한 배경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지명길은 그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노민지는 알아본 듯했다.

“리정후.”

그녀가 너무 작게 말해서 지명길은 처음엔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고요?”

노민지는 화면을 껐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배.”

“지금 중요한 건 이 돈이 의원님에게 들어온 돈이 아니라, 의원님 이름으로 나갈 돈이라는 거예요. 누군가 후원회에 의심스러운 돈을 넣고, 다시 캠프 지출로 연결된 것처럼 만들면 의원님은 끝납니다.”



그녀의 판단은 정확했다. 지명길은 곧바로 머릿속에서 그림을 그렸다. 외국계 재단과 연결된 사람들이 소액 후원자로 위장해 돈을 넣는다. 그 뒤 캠프는 자신도 모르게 그 돈이 섞인 계좌에서 특정 업체에 자문료를 지급한다. 그 업체가 다시 한중문화교류재단이나 해외 법인과 연결되어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그러면 프레임은 단순해진다. 장천길 캠프가 외국계 네트워크의 돈을 받아 그들과 연결된 업체에 돈을 흘려보냈다. 금액이 작아도 상관없다. 선거판에서는 ‘가능성’이라는 단어가 사실보다 오래 살아남는다.

“누가 우리 회계 파일에 접근했죠?”

“명길 씨, 그건 나중에.”

“나중이 아닙니다. 이건 내부 접근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더 조용히 해야 해요.”

노민지는 단호했다. “지금 회계팀 전체를 흔들면 내부에서 누가 움직였는지 영영 못 찾습니다. 일단 이 업체 지급 보류 걸고, 후원금 이상 입금 목록은 별도 분리하세요. 그리고 의원님께는 내가 보고합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아니요.”

“왜 선배가 합니까?”

“의원님은 명길 씨가 보고하면 감정적으로 움직일 겁니다. 내가 보고하면 정치적으로 판단할 거고요.”

지명길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치적으로 판단한다는 말, 이제는 믿기 어렵습니다.”

노민지는 그 말을 듣고도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차갑게 말했다. “믿지 않아도 돼요. 지금은 믿음보다 처리 순서가 중요하니까.”

그때 복도 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곧이어 장천길이 의원실로 들어왔다. 회색 코트 위에 눈에 띄지 않는 남색 목도리를 두른 그는 평소보다 얼굴이 더 깊어 보였다. 전날 기사와 아침 방송을 모두 확인한 눈이었다. 그는 사무실 안의 어색한 침묵을 단번에 느꼈다.

“무슨 일 있나?”

지명길과 노민지는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 짧은 정적만으로도 장천길은 대답을 얻은 듯했다. 그는 문을 닫고 안쪽 회의 테이블로 걸어갔다.

“둘 다 앉아.”

세 사람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지명길은 숨을 고르고 후원금 이상 패턴, 결제 코드, 청해전략연구소 지출 메모, 한중문화교류재단 세미나 후원 명단을 차례대로 설명했다. 장천길은 중간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손가락을 모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지명길의 설명이 끝날 때까지 눈을 한 번도 피하지 않았다.

설명이 끝나자 장천길은 노민지를 보았다.

“청해전략연구소. 누가 넣었지?”

노민지는 대답하기 전 아주 짧게 숨을 들이마셨다.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정식 계약이 아닙니다. 누군가 초안 지출 목록에 끼워 넣은 것 같습니다.”

“네가 아는 범위에서는?”

장천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 때문에 더 날카로웠다. 노민지는 시선을 내리지 않았다.

“확인하겠습니다.”

“리정후라는 이름은?”

지명길은 놀라 장천길을 보았다. 장천길이 먼저 그 이름을 꺼낼 줄은 몰랐다. 노민지도 눈빛이 흔들렸다.

“의원님이 그 이름을 어떻게…”

장천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안쪽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아침 일찍 지역 사무소로 도착한 익명 팩스였다. 종이에는 흐릿한 흑백 사진 하나와 짧은 문장이 인쇄되어 있었다. 사진 속에는 젊은 장천길처럼 보이는 남자와, 얼굴이 반쯤 가려진 다른 남자, 그리고 뒤쪽에 서 있는 긴 코트 차림의 여자가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영문과 숫자가 섞인 표기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BY-91 / East Line / Donor Room

그리고 그 아래, 한국어 문장 하나.

‘돈은 늘 기억보다 오래 남는다.’

지명길은 종이를 보는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백야. 동부선. 후원회. 전혀 다른 단어들이 한곳으로 모이고 있었다. 노민지는 사진 속 여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읽기 어려웠다. 놀람인지, 두려움인지, 아니면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다시 확인한 사람의 체념인지 알 수 없었다.

장천길이 조용히 물었다.

“민지 씨.”

“예.”

“이 사진 속 여자, 알아보겠나?”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졌다. 지명길은 그녀가 모른다고 말하길 바랐다. 그러나 노민지는 쉽게 거짓말하지 않았다. 적어도 완전히 들킬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사진이 너무 흐립니다.”

그것은 부정이 아니었다.

장천길은 종이를 다시 접었다. “좋아. 그럼 흐린 사진부터 선명하게 만들어 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원회 계좌는 오늘부터 내가 직접 본다. 청해전략연구소 지급은 보류하고, 이상 입금자는 영수증 발급 중지. 외부에는 지지자 결집으로만 설명해. 그리고…”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두 보좌관을 번갈아 보았다.

“이 일은 의원실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지명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노민지도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천길은 그 미묘한 시간 차이를 놓치지 않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전이 지나자 의원실은 다시 바빠졌다. 언론 대응 문안이 돌고, 지역구 행사 일정이 조정되고, 장천길은 두 개의 라디오 인터뷰를 취소했다. 겉으로 보면 그저 위기 대응이었다. 그러나 지명길에게 의원실은 이제 전혀 다른 공간처럼 느껴졌다. 책상, 전화기, 프린터, 커피잔, 후원자 명단. 모두 익숙한 물건이었지만, 그 사이 어딘가에 보이지 않는 손이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점심 무렵 지명길은 회계 백업 파일을 다시 확인했다. 이상 입금 목록을 별도 저장하고, 청해전략연구소 지출 메모의 생성 시간을 추적했다. 생성자는 공용 계정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의원실 직원 누구나 쓰는 계정이었다. 그 자체가 문제였다. 누군가 특정 사람을 숨기기 위해 공용 계정을 쓴 것인지, 아니면 애초에 의원실 내부 사람이 아닌 누군가가 공용 계정으로 들어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로그 파일을 더 내려가 보았다. 그리고 한 줄 앞에서 멈췄다.

접속 시간은 전날 밤 11시 42분. 접속 위치는 의원실 내부망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 의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최소한 출입 기록상으로는 그랬다. 접속 계정은 공용. 수정 항목은 ‘자문료 지급 예정 목록’. 대상 업체는 청해전략연구소.

그리고 비고란에는 누군가 지워 놓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완전히 삭제되지 않은 문자열 조각이었다.

WHN-DONOR-KYH

지명길은 화면을 확대했다. KYH. 강윤호의 영문 약자일 수 있었다. 동시에 전혀 다른 사람의 이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머릿속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는 마우스를 놓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지명길은 잠시 망설이다가 받았다.

“지명길 보좌관님 맞습니까?”

여자의 목소리였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감정을 지운 목소리.

“누구십니까?”

“후원자 명단에서 ‘강윤호’를 찾지 마십시오.”

지명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신 누구야?”

“그 이름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사람 이름으로 된 방이 있습니다. 돈이 모이고, 기록이 바뀌고, 사람의 과거가 새로 만들어지는 방.”

지명길은 숨을 죽였다. 수화기 너머의 소리는 너무 또렷했다. 녹음된 음성 같기도 했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방입니까?”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후원회.”

전화가 끊겼다.

지명길은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손이 떨리고 있었다. 방금 들은 말은 말장난처럼 보였지만, 지명길은 웃을 수 없었다. 후원회. 정치인의 깨끗한 지지 기반이어야 할 그 공간이, 누군가에게는 돈과 이름과 과거를 조작하는 방이라는 뜻일 수 있었다.

그는 다시 엑셀 파일을 열었다. 검색창에 ‘강윤호’를 입력했다. 아무 결과도 나오지 않았다. 다시 영문 약자 ‘KYH’를 입력했다. 역시 없었다. 그는 안도의 숨을 내쉬려 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자신이 검색 범위를 잘못 잡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후원자 이름 열이 아니라, 영수증 수령 주소 비고란을 검색해야 했다.

그는 전체 시트를 대상으로 다시 검색했다.

한 건이 잡혔다.

후원자 이름은 ‘강유한’이었다. 금액은 49,000원. 주소는 존재하지 않는 오피스텔. 전화번호는 결번. 이메일 주소는 ‘whiteharbor91’로 시작했다. 비고란에는 아무 설명 없이 세 글자만 들어 있었다.


KYH.


지명길은 그 줄을 오래 바라보았다. 강윤호는 명단에 없었다. 그러나 강윤호를 가리키는 표식은 명단 안에 있었다. 누군가 너무 노골적이지 않게, 그러나 알아볼 사람은 알아보라는 듯 흔적을 남겨 두었다.

그는 파일을 복사해 암호를 걸고, 개인 저장장치에 옮겼다. 그리고 처음으로 장천길에게 바로 보고하지 않았다. 노민지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방금 어떤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순간 지명길은 이상하게 확신했다. 이 파일을 모두에게 보여 주는 순간, 파일은 사라지거나 변할 것이다. 정치판에서 증거는 발견되는 순간부터 증거가 아니라 협상의 대상이 된다.

해가 기울 무렵, 의원실 창밖으로 국회 앞 도로의 불빛이 하나둘 켜졌다. 지명길은 혼자 남아 후원자 명단을 다시 보았다. 이름들은 여전히 평범했다. 김성호, 이민수, 박정환, 강유한. 그러나 이제 그 평범함은 위장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정치인을 무너뜨리려면 거대한 비자금이나 검은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명길은 그날 깨달았다. 때로는 49,000원이면 충분하다. 잘못된 시간에, 잘못된 이름으로, 잘못된 방향에서 들어온 작은 돈 하나가 한 사람의 과거 전체를 오염시킬 수 있다.

그는 모니터를 끄기 전 마지막으로 백업 파일명을 바꾸었다.

‘후원회_이상입금_1차검토.’

잠시 생각하다가, 그 뒤에 괄호를 하나 더 붙였다.

‘백야 관련 가능성.’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 화면이 한 번 깜박였다. 지명길은 처음에는 단순한 프로그램 오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초 뒤 경고창이 떠올랐다.

‘현재 파일은 다른 사용자가 열람 중입니다.’

그는 숨을 멈췄다. 사무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복도도 조용했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문, 꺼진 TV, 빈 의자들.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화면 오른쪽 아래, 접속 알림 창에는 분명히 다른 계정 하나가 떠 있었다.


사용자명: DEER-EYES



지명길은 그 이름을 읽는 순간, 워싱턴의 명함도, 송민희의 메모도, 장천길의 사진도 알지 못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자신이 방금 본 것은 단순한 해킹 흔적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 파일을 보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이 파일을 보게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는 전원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 파일도 닫지 않았다. 대신 휴대전화를 들어 사진을 찍었다. 화면 속 이름이 작게 흔들렸다.


DEER-EYES.


그날 밤, 지명길은 처음으로 정치인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싸우기 시작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