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조용한 침투
제9장 검은 USB
제2절 숨겨진 거래
지명길은 USB를 뽑지 않았다.
손가락은 본체 앞쪽 포트 가까이에 멈춰 있었지만, 그는 끝내 그 작은 검은 금속 조각을 잡아 빼지 못했다. 의원실 안은 새벽 특유의 축축한 정적에 잠겨 있었다. 복도의 센서등은 사람의 움직임이 사라질 때마다 하나씩 꺼졌고, 창밖 국회 잔디밭은 아직 검은 유리판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사무실 안에서는 회의용 컴퓨터의 팬이 작게 돌았고,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는 방금 전까지 떠 있던 알림창의 잔상이 눈에 박힌 듯 남아 있었다.
DEER-EYES has viewed the file.
그 문장은 영어였지만, 지명길에게는 마치 누군가가 귀 가까이에 대고 속삭인 한국말처럼 들렸다. 사슴눈이 파일을 보았다. 사슴눈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이름은 이미 의원실 안에서 금지어처럼 떠돌고 있었다. 송민희가 받은 메모에도, 국정원 쪽에서 흘러나왔다는 소문에도, 최근 인터넷 댓글의 삭제된 흔적에도 그 단어가 있었다. 처음에는 장난스러운 코드명처럼 보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누군가 이 USB를 열어 보기 전부터, 이 파일을 누가 볼지 알고 있었다.
지명길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붙이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목이 말랐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물을 마실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검은 USB 안에는 세 개의 폴더가 있었다. DONOR. EASTLINE. H-DOYUN. 이름만 놓고 보면 후원회 의혹, 동부선, 한도윤. 세 방향으로 갈라져 있는 듯했지만, 각각의 폴더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선들은 다시 한곳에서 만났다. 청해전략연구소. 한중문화교류재단. 리정후. 검은 팔찌를 찬 남자. 그리고 여러 파일 곳곳에 희미하게 찍혀 있는 약어 하나.
BY-91.
그는 몇 번이고 같은 파일을 열어 보았다. H-DOYUN 폴더에는 짧은 동영상 세 개가 있었다. 화질은 낮았고, 음성은 거의 들리지 않았지만, 화면 속 남자의 옆모습은 한도윤 의원이 분명했다. 한도윤은 자유우국당 내에서 장천길을 견제하는 가장 날카로운 인물이었다. 그는 겉으로는 당의 단합을 말했지만, 실제로는 장천길이 3선에 성공한 뒤 당내 주도권을 잡는 것을 누구보다 싫어했다. 그런데 그가 검은 팔찌를 찬 남자와 지하 주차장에서 만나는 장면이 USB에 들어 있었다.
문제는 영상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점이었다. 정치판에서 진짜 치명적인 자료는 대개 이렇게 친절하지 않다. 진짜 비밀은 흐릿하고, 불완전하고, 해석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영상은 누가 봐도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도윤을 보라. 장천길이 아니라 한도윤을 의심하라. 지명길은 그 친절함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그는 DONOR 폴더로 다시 들어갔다. 장천길 후원회 명단을 오염시킨 흔적은 분명했다. 동일한 시간 간격, 유사한 이메일 생성 규칙, 반복되는 결제 대행 경로. 누군가 일부러 작은 돈을 수백 갈래로 쪼개 장천길 캠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돈은 선거를 이기게 할 만큼 크지 않았다. 그러나 선거를 망치기에는 충분했다. 불법 정치자금이라는 말이 붙는 순간, 금액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치적 생명은 숫자가 아니라 의심으로 죽었다.
EASTLINE 폴더 안에는 더 이상한 것들이 있었다. 오래된 문서 스캔본, 영어와 러시아어가 섞인 메모, 날짜가 지워진 사진, 그리고 파일명만 남아 열리지 않는 문서 하나.
TRADELOG_2008.enc
암호화 파일이었다. 지명길은 몇 번 열어 보려 했지만 실패했다. 파일 설명에는 짧은 문장이 붙어 있었다.
When White Night melts, Red Winter returns.
지명길은 그 문장을 소리 내어 읽지 않았다. 괜히 소리 내어 읽는 순간, 사무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귀가 그 말을 듣고 반응할 것 같았다. 그는 모니터를 노려보다가 마우스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정치인의 보좌관으로 일하며 수많은 문건을 봤다. 상대 후보의 약점, 공천 경쟁자의 험담, 지역 유지의 뒷거래, 기자가 원하는 떡밥, 시민단체가 원하는 명분. 그러나 지금 보고 있는 것은 그런 종류의 자료가 아니었다. 이건 캠프 내부 문제가 아니라, 누군가 캠프를 하나의 통로로 삼아 오래된 문을 다시 열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때 문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지명길은 몸을 굳혔다. 손은 저절로 USB 쪽으로 갔다. 그러나 문이 열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노민지가 들어왔다.
그녀는 회색 코트를 벗지도 않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머리는 정돈되어 있었고, 입술에는 옅은 색조가 남아 있었다. 새벽에 급히 달려온 사람처럼 숨이 차지도 않았고, 놀란 얼굴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이 시간에 이 방에 누가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차분했다.
“아직 안 뽑았네요.”
지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민지는 책상 앞에 섰다. 그녀의 시선이 모니터를 한 번 훑고 USB에 멈췄다. 그리고 아주 짧게,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명길은 그 흔들림을 놓치지 않았다. 노민지는 대개 놀라도 놀라지 않은 척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눈동자를 놓쳤다면, 정말로 예상 밖의 무언가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이걸 알고 있었습니까?” 지명길이 물었다.
“무엇을요?”
“이 USB요. 이 자료들. 후원회 파일. 한도윤 영상. 동부선. BY-91. 그리고 사슴눈.”
노민지는 대답하기 전에 방 안의 블라인드를 확인했다. 복도 쪽 유리벽 아래 작은 틈까지 살폈다. 그 동작은 지명길의 분노를 더 키웠다. 그녀는 부정하기 전에 먼저 감시를 확인했다. 즉, 이 대화가 위험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USB를 제게 주세요.”
“대답부터 하세요.”
“지금은 설명보다 회수가 먼저예요.”
“회수요?” 지명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게 의원님을 죽일 수도 있는 자료인데, 설명보다 회수가 먼저라고요?”
“그래서 회수가 먼저라고요.”
노민지는 낮고 빠르게 말했다. “명길 씨, 지금 당신이 보고 있는 건 증거가 아니에요. 증거처럼 보이게 만든 칼이에요. 칼끝이 누구를 향하는지 아직 모르면서 손잡이를 잡으면, 손잡이를 잡은 사람부터 피를 흘려요.”
지명길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누가 만든 칼인지 알고 있습니까?”
“일부는요.”
“일부?”
“전부 아는 사람은 없어요. 전부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제일 위험한 사람이에요.”
지명길은 노민지를 바라보았다. 피곤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눈앞이 잠깐 흐려졌다. 그는 지난 몇 주 동안 그녀를 의심했다. 노민지는 장천길을 지키는 사람인지, 장천길을 상품처럼 관리하는 사람인지 알 수 없었다. 선거판의 언어로 말했고, 감정이 아니라 수치와 프레임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얼굴에는 계산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포가 있었다. 아주 얇고 잘 감춘 공포.
“리정후를 만났죠.”
노민지는 입술을 다물었다.
“종로 청운재. 한중문화교류재단. 청해전략연구소. 다 연결되어 있잖습니까.”
“누가 말했어요?”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해요.” 노민지가 날카롭게 말했다. “이 판에서는 누가 말했는지가 내용보다 중요할 때가 많아요. 같은 말도 누가 던졌느냐에 따라 미끼가 되기도 하고, 경고가 되기도 해요.”
지명길은 USB를 손으로 감쌌다. “그러면 이건 경고입니까, 미끼입니까?”
노민지는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에서는 새벽 쓰레기 수거차가 멀리서 낮은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사무실 형광등은 오래 켜져 있어 미세하게 떨렸다. 그 떨림이 두 사람의 침묵 사이에 얇은 칼날처럼 걸렸다.
“둘 다예요.”
노민지의 대답은 거의 속삭임에 가까웠다.
지명길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정말 편리한 답이네요.”
“편리해서가 아니라 사실이 그래요. 누군가는 이걸로 의원님을 죽이려고 해요. 누군가는 이걸로 한도윤을 찌르려고 하고요. 누군가는 우리가 이걸 어떻게 쓰는지 보고 다음 사람을 정하려고 해요.”
“다음 사람?”
“다음으로 죽일 사람.”
지명길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노민지는 책상 가장자리에 손을 올렸다. “후원회 파일은 오래전부터 심어진 겁니다. 선거 막판에 터뜨리기 위해서요. 그런데 누군가 순서를 바꿨어요. 원래는 장천길 의원의 지지율이 올라가고, 당에서 역할이 커지고, 자유우국당 내부가 그를 밀어야 할지 버려야 할지 계산하는 순간에 터뜨릴 자료였어요. 그런데 지금 너무 빨리 나왔어요.”
“누가 순서를 바꿨습니까?”
“붉은 겨울 쪽일 가능성이 있어요.”
지명길은 처음 듣는 이름에 눈살을 찌푸렸다. “붉은 겨울이 뭡니까?”
노민지는 잠깐 실수했다는 듯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당신은 아직 몰라도 돼요.”
“또 그 말입니까?”
“알면 보호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아니요. 이 판에서는 아는 순간, 증인이 되거나 표적이 돼요.”
“그럼 노 보좌관님은 뭡니까? 증인입니까, 표적입니까, 아니면 공범입니까?”
이번에는 노민지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지명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화가 섞여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피로가 더 컸다.
“저는 거래를 했어요.”
지명길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거래요?”
“의원님을 살리기 위한 거래.”
“그런 말로 포장하지 마십시오.”
“포장 아니에요.” 노민지는 차갑게 말했다. “리정후 쪽에서 처음 접촉했을 때, 그들은 후원회 파일 일부를 이미 가지고 있었어요. 그쪽이 요구한 건 간단했어요. 의원님이 선거 이후 한중문화교류재단 정책토론회에 참석하고, 대만 문제와 동북아 안보 현안에 대해 ‘균형 잡힌 발언’을 해 달라는 것. 직접적인 돈도, 법안도, 약속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더 위험했죠.”
지명길은 말없이 그녀를 보았다.
“저는 거절하지 않았어요.” 노민지는 스스로에게 판결을 내리듯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시간을 벌었어요.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 자료가 터지는 걸 막으려고.”
“의원님께 보고했습니까?”
“못 했어요.”
“왜요?”
“보고하는 순간, 의원님은 선택해야 하니까요. 거절하면 바로 터지고, 받아들이면 그 순간 약점이 됩니다. 저는 그 선택을 미루고 싶었어요.”
“그게 노 보좌관님이 선택할 일이었습니까?”
지명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 안에는 오래 참은 분노가 들어 있었다. “의원님은 자기 이름으로 죽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보좌관이 의원님 대신 더러운 선택을 합니까?”
“정치는 깨끗한 선택지를 고르는 일이 아니에요.”
“그 말, 정말 지겹습니다.”
지명길은 USB를 뽑아 주머니에 넣었다. 노민지의 시선이 그의 손을 따라갔다.
“그걸 갖고 나가면 안 돼요.”
“왜요? 리정후에게 넘기기로 했습니까?”
“명길 씨.”
“아니면 문석표에게 먼저 넘어갈 자료와 맞춰 봐야 해서요?”
노민지의 얼굴이 처음으로 확실히 변했다. 그 반응 하나만으로도 지명길은 알 수 있었다. 문석표. 그녀는 그 이름이 이 USB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그쪽에서 이미 다른 USB를 받았겠죠. 이건 의원실에 들어온 버전이고, 경찰에는 다른 버전이 들어갔을 겁니다. 여기에는 한도윤 폴더가 있고, 경찰 쪽에는 없겠죠. 맞습니까?”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명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추측으로 움직이면 안 돼요.”
“추측이 아니라 구조입니다. 같은 자료를 서로 다르게 나눠 주고, 각자가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만 보게 만든다. 언론에는 장천길을, 경찰에는 후원회 불법을, 캠프에는 한도윤을, 국정원에는 백야를 보여 주는 거죠. 그러면 모두가 서로 다른 진실을 들고 서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노민지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이제야 보네요.”
“뭘요?”
“왜 당신에게 이 USB가 갔는지.”
지명길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노민지는 의자에 앉았다. 처음 방에 들어왔을 때의 차분함은 사라져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당신은 장천길 의원을 믿으니까요. 그래서 가장 늦게 의심하지만, 한 번 의심하면 끝까지 가요. 누군가는 그걸 알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이 이 자료를 보면, 의원님보다 먼저 자료의 구조를 볼 거라고 계산했겠죠.”
“누가요?”
“아마 사슴눈.”
지명길의 주머니 속 USB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 시각, 서울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의 ‘물방’에서는 문석표가 두 번째 검은 USB를 열고 있었다.
그는 장갑을 끼지 않았다. 어차피 이 USB는 공식 압수물이 아니었다. 공식이 되기 전에 비공식으로 먼저 열어 보고, 필요한 모양으로 정리한 뒤에야 사건으로 만들면 된다. 그것이 문석표가 배운 방식이었다. 그는 수많은 사건을 그런 식으로 다루었다. 어떤 것은 너무 크게 만들었고, 어떤 것은 너무 작게 만들었다. 진실은 사건 기록 안에서 늘 적당한 크기로 잘렸다.
USB 안에는 폴더가 두 개뿐이었다.
DONOR_FULL.
PRESS_SUMMARY.
한도윤 폴더는 없었다. EASTLINE도 없었다. 백야도, 강윤호도, 사슴눈도 없었다. 문석표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낮게 웃었다. 이건 경찰에게 보여 주기 위해 만든 버전이었다. 장천길 후원회 의혹을 사건화하는 데 필요한 자료만 남아 있었다. 후원자 명단, 결제 경로, 청해전략연구소 송금 내역, 선관위 신고 누락 가능성, 그리고 언론 브리핑용 요약본.
그는 PRESS_SUMMARY 파일을 열었다. 첫 문장은 거의 기사 제목처럼 쓰여 있었다.
“장천길 캠프, 조직적 쪼개기 후원 의혹.”
문석표는 혀를 찼다. “기자들이 좋아하겠네.”
옆에 있던 수사관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팀장님, 이거 출처는 어떻게 처리합니까?”
“제보.”
“익명 제보로요?”
“대한민국 수사의 절반은 익명 제보에서 시작해.” 문석표는 파일을 넘기며 말했다. “문제는 익명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우리가 그 제보를 언제 공식으로 만드느냐지.”
“장천길 의원실 압수수색까지 갑니까?”
문석표는 대답하지 않고 DONOR_FULL 폴더 안쪽의 표를 훑었다. 표는 지나치게 정리되어 있었다. 수사관이 만들기에는 너무 깔끔했고, 기자가 만들기에는 너무 깊었다. 정보기관 냄새가 났다. 혹은 정보기관 냄새를 흉내 낸 누군가의 작업물일 수도 있었다.
그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 표시 없음.
문석표는 수사관을 내보낸 뒤 전화를 받았다.
“문석표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바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짧은 침묵 뒤,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흘리지 말고, 먼저 움직이십시오.”
문석표는 눈을 가늘게 떴다. “누구십니까?”
“2008년에도 늦게 움직여서 사람이 죽었지요.”
문석표의 손등에 핏줄이 섰다. 그는 창밖을 보았다. 아직 새벽이었고, 경찰청 안뜰에는 아무도 없었다.
“협박입니까?”
“기억입니다.”
전화는 끊겼다.
문석표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2008년. 그 숫자는 오래전에 닫아 두었다고 믿었던 서랍을 열었다. 대학생 사망 사건. 사라진 CCTV. 사라진 진술서. 그리고 그날 밤 기록보관실에 나타났던 이름 없는 남자. 문석표는 그 남자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검은 코트와 지나치게 조용한 목소리만 기억했다.
그는 USB 화면을 다시 보았다. 이번 사건은 장천길을 잡는 사건처럼 보였다. 그러나 누군가는 문석표 자신까지 같은 그물 안에 넣고 있었다.
여의도의 작은 카페에서는 송민희가 세 번째 메시지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전날 밤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장천길 기사 이후 회사 안팎에서 연락이 쏟아졌고, 배철중은 그녀의 기사가 만들어 낸 파장을 즐기는 듯했다. 하지만 민희는 기뻐하지 않았다. 자신이 쓴 문장과 자신이 쓰지 않은 문장이 뒤섞여 한 사람을 몰아가고 있었다. 기자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오보를 냈을 때만이 아니다. 맞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누군가의 거짓을 완성하는 데 쓰였을 때도 위험하다.
그녀의 휴대전화에 낯선 메일이 도착했다. 제목은 짧았다.
TWO BLACKS.
본문에는 한 줄뿐이었다.
Compare the two black drives. The truth is not in the files, but in what is missing.
첨부파일은 없었다. 발신자 주소는 몇 초 뒤 자동으로 사라졌다. 민희는 화면을 캡처하려 했지만, 캡처가 저장되지 않았다. 그녀는 손가락을 멈췄다. 기술적인 장난인지, 보안 프로그램인지, 누군가의 과시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문장은 분명했다. 검은 USB는 하나가 아니다. 진실은 들어 있는 파일이 아니라 빠져 있는 파일에 있다.
민희는 곧바로 지명길에게 연락하려 했다. 번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장천길 의원실 공용 연락망을 통해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전화를 걸기 직전 멈췄다. 지금 지명길에게 전화하면, 자신이 어떤 정보를 갖고 있는지 노출된다. 배철중도 그녀의 통화 기록을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이 회사에서 정보는 늘 예상보다 빨리 샜다.
그녀는 대신 짧은 문자를 보냈다.
“USB가 하나가 아닐 수 있습니다. 빠진 폴더를 보세요.”
보내고 나서야 그녀는 자신이 이미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았다. 기자는 취재 대상에게 조언하지 않는다. 적어도 원칙은 그랬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취재하고 있는 것은 장천길 개인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들어 놓은 판이었다. 그 판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역시 선택이었다.
국정원 지하 분석실에서는 이철규가 전날 밤부터 들어온 로그를 맞추고 있었다.
그는 지명길의 컴퓨터에 접근한 적이 없었다. 장천길 의원실 내부망에 직접 접속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알림에는 분명히 사슴눈이 파일을 열람했다고 표시되어 있었다. 누군가 그의 코드명을 쓰고 있었다. 혹은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군가 ‘사슴눈’이라는 이름이 어디에 나타나야 가장 큰 혼란을 일으킬지 알고 있었다.
차휘는 책상 맞은편에 서 있었다. “선배님, 이거 내부에서 샌 겁니다.”
“너무 빨라.”
“빠르면 내부죠.”
“아니.” 이철규는 화면을 확대했다. “내부라면 이렇게 티 나게 안 해. 이건 내부자가 있다는 걸 우리한테 보여 주려는 방식이야.”
“그러면 진짜 내부자는 없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지.”
차휘는 헛웃음을 쳤다.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고. 대체 뭘 믿어야 합니까?”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개의 해시값을 비교하고 있었다. 의원실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USB의 일부 로그와 경찰 쪽에서 흘러나온 파일 조각. 둘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처럼 보였지만, 중간에 누군가 가지를 잘라 냈다. 경찰 버전에는 H-DOYUN이 없었다. EASTLINE도 없었다. 대신 PRESS_SUMMARY가 있었다. 언론에 흘리기 좋은 문장들이 정리된 폴더.
“버전이 다릅니다.” 차휘가 말했다.
“의도적으로.”
“누가요? 해연망입니까?”
이철규는 잠시 생각했다. “해연망은 보통 이렇게 불을 크게 안 질러. 걔들은 불을 이용하지, 불구경을 즐기진 않아.”
“그럼 붉은 겨울?”
“붉은 겨울은 불을 질러. 그런데 이렇게 정교하게 후원회 파일을 세공하진 않아.”
차휘가 이를 악물었다. “그럼 둘 다입니까?”
이철규는 화면 속 BY-91 표식을 바라보았다. “아니. 둘 다가 쓰는 오래된 통로가 있는 거야.”
차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오래된 통로요?”
“백야.”
그 이름이 나오자 방 안의 공기가 미묘하게 변했다. 차휘는 더 묻지 않았다. 이철규는 탁강래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동시에 보고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탁강래는 백야를 덮으려 했다. 그런데 지금 백야는 덮을수록 더 넓게 번지고 있었다.
지명길은 송민희의 문자를 받았을 때, 아직 노민지와 마주 서 있었다.
그는 문자를 보고 아무 말 없이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았다. 노민지는 그의 표정을 읽으려 했지만, 지명길은 이번에는 얼굴을 내주지 않았다.
“누구예요?”
“기자요.”
“송민희?”
지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노민지는 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다.
“그 기자를 믿어요?”
“노 보좌관님보다 덜 의심할 이유는 있죠.”
노민지는 상처받은 듯했지만, 곧 표정을 지웠다. “송민희도 이용당하고 있어요.”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 왜?”
“이용당하는 사람이 모두 적은 아니니까요.”
노민지는 그 말을 듣고 한순간 지명길을 낯설게 보았다. 순진한 보좌관이라고 생각했다. 장천길을 사람으로 믿고, 정치판의 더러움을 끝까지 견디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얼굴에는 순진함보다 고집이 더 많았다. 어쩌면 그래서 이 USB가 그에게 간 것일지도 몰랐다.
지명길은 책상 서랍에서 작은 봉투를 꺼냈다. USB를 그 안에 넣고 봉했다.
“의원님께 보고할 겁니다.”
“안 돼요.”
“왜 안 됩니까?”
“보고하는 순간, 의원님은 선택해야 해요. 한도윤을 칠지, 후원회 의혹을 방어할지, 백야를 부정할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상대가 원하는 그림이에요.”
“그러면 숨깁니까?”
“숨기는 게 아니라 순서를 정해야 해요.”
“그 순서를 노 보좌관님 혼자 정하다가 여기까지 온 겁니다.”
노민지는 입을 다물었다.
지명길은 봉투를 안주머니에 넣었다. “저도 이제 제 순서대로 하겠습니다.”
“명길 씨.”
그가 문 쪽으로 걸어가자 노민지가 불렀다. 목소리에는 명령보다 부탁이 더 많았다.
“그걸 경찰이나 언론에 바로 넘기면 의원님은 끝나요.”
지명길은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바로 넘기지 않습니다.”
“그럼 어디로 갑니까?”
그는 잠시 멈췄다.
“사슴눈이 뭘 보고 있는지 확인하러요.”
노민지는 그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지명길이 의원실을 나간 뒤, 그녀는 한동안 빈 사무실에 혼자 서 있었다. 창밖으로 아주 옅은 새벽빛이 번지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식은 커피와 출력하다 만 여론조사표, 장천길의 기자회견 초안, 그리고 방금 전까지 검은 USB가 꽂혀 있던 컴퓨터가 남아 있었다.
노민지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리정후에게서 온 메시지가 떠 있었다.
거래는 끝났습니다.
문석표가 열었습니다.
다음은 송민희입니다.
그녀는 메시지를 지우지 않았다. 지우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미 누군가는 그녀가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노민지는 천천히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처음에는 시간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선거가 끝날 때까지만, 장천길이 살아남을 때까지만, 그 뒤에 정리하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거래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한 번 손을 대면, 자신이 놓고 싶을 때 놓을 수 있는 줄이 아니었다. 거래는 사람의 손목에 감기는 실이었다. 처음엔 느슨하지만, 움직일수록 조여 온다.
그녀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는 발신자 표시가 있었다.
장천길.
노민지는 몇 초 동안 전화를 받지 못했다. 화면 위에서 이름이 계속 떨렸다. 마침내 그녀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의원님.”
수화기 너머의 장천길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
“민지 씨. 강윤호라는 이름 말입니다.”
노민지의 숨이 아주 짧게 멎었다.
“네.”
“방금 누가 전화를 했습니다.”
“무슨 전화였습니까?”
장천길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침묵 사이로 멀리 차가 지나가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렸다.
“그 사람이 말하더군요. 강윤호가 살아 있다면, 가장 먼저 노민지를 찾아갈 거라고.”
노민지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누군가는 이제 장천길에게도, 지명길에게도, 송민희에게도, 문석표에게도, 이철규에게도 서로 다른 조각을 나누어 주고 있었다. 모두가 자신만의 진실을 갖게 되는 순간, 아무도 전체를 보지 못한다.
그것이 숨겨진 거래의 진짜 목적이었다.
돈도, 기사도, 수사도 아니었다.
사람들이 서로를 먼저 의심하게 만드는 것.
그 의심 속에서, 오래전 백야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