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조용한 침투
제10장 총선의 밤
제2절 첫 번째 죽음
개표가 끝난 뒤의 새벽은 승자의 시간도, 패자의 시간도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잠시 숨을 멈춘 듯했다. 밤새 환호와 탄식, 박수와 욕설, 전화벨과 속보음으로 뒤섞였던 서울은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짧은 침묵을 맞았다. 도로 위의 선거운동 차량들은 스피커를 내린 채 주차장으로 돌아갔고, 후보 이름이 적힌 현수막은 밤이 지나자마자 피로한 천 조각처럼 축 처졌다. 사람들은 결과를 확인하고 잠들었지만, 선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선거가 끝난 뒤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선자보다 늦게 웃고, 낙선자보다 늦게 분노하며, 언론보다 먼저 다음 판을 정리했다.
국정원 연락분석실 지하 2층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이철규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밤새 올라온 선거 관련 동향 보고와 해외발 논평, 주요 후보 캠프 주변 통신량 변화, 온라인 키워드 흐름이 한 화면에 겹쳐 있었다. 통계와 그래프와 지명과 사람 이름들. 선거가 끝나면 숫자는 단순해지는 듯 보였지만, 정보기관의 화면에서는 오히려 더 복잡해졌다. 표는 끝났고, 의미가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차휘는 옆자리에서 세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커피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종이컵 바닥에 갈색 물이 조금 남아 있는 수준이었다. 그는 밤새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영등포 환승통로에서 놓친 검은 팔찌 남자, 보관함 속 겨울매화 표식, 전단지 뒷면의 마이크로도트, 그리고 휴대전화에 떠올랐던 문장. 사슴눈, 당신은 오늘도 늦었다. 그 문장은 차휘의 신경을 긁어 놓았다. 정확히는 이철규를 겨냥한 문장이었지만, 차휘는 그 말이 자신에게 날아온 조롱처럼 느껴졌다.
“장천길은 당선됐습니다.”
차휘가 건조하게 말했다. 모니터 한쪽에는 장천길의 지역구 최종 결과가 고정돼 있었다. 득표율 48.61퍼센트. 2위 후보와의 표 차는 1,043표. 화면 속 숫자는 승리를 뜻했지만, 그 숫자를 보는 누구도 장천길이 이겼다고만 말할 수 없었다.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다른 화면을 보고 있었다. 해외 서버를 거친 짧은 통신 기록. 발신지는 정확히 나오지 않았다. 여러 국가의 중계점을 지나며 지워진 흔적이었다. 그러나 수신 패턴은 분명했다. 선거 결과가 확정된 지 7분 뒤, 한국어와 영어가 섞인 짧은 문장이 세 곳으로 동시에 발송되었다.
Wounded survivor confirmed.
Phase one proceeds.
상처 입은 생존자 확인.
1단계 진행.
이철규는 그 문장을 몇 번이나 읽었다. 켈러가 워싱턴에서 송민희에게 했던 말과 비슷한 문장, 리정후가 노민지에게 보여 준 보고서 안의 표현과 같은 구조, 여론조사 조작 문서에 숨어 있던 분석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같은 단어가 너무 자주 나타났다. 누군가는 장천길의 당선을 승리나 패배가 아니라 ‘상처 입은 생존’이라는 상태로 정의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다음 단계의 전제였다.
“발신 경로 다시 뽑아.”
“이미 뽑았습니다.” 차휘가 화면을 밀어 보였다. “일본, 싱가포르, 루마니아, 캐나다를 거쳐 들어왔습니다. 마지막 중계 서버는 7분 만에 폐쇄됐고요.”
“수신지는?”
“하나는 추적 불가. 하나는 청해전략연구소 쪽 비상용 클라우드로 보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차휘가 말을 멈췄다.
이철규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야?”
“경찰 내부망과 닿아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청 지능범죄수사대 쪽 임시 자료함입니다.”
문석표.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동시에 같은 사람을 떠올렸다. 선거 전날 장천길 후원회 사건을 확대하고, 경찰 기록을 조절하고, 언론에 흘릴 자료를 골랐던 인물. 그도 같은 문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 연락분석실 구석의 비상 알림등이 한 번 짧게 깜박였다. 일반 업무망이 아니라 현장팀 안전채널이었다. 차휘가 먼저 반응했다. 그는 컵을 내려놓고 키보드를 두드렸다. 이철규는 그의 어깨 너머로 뜨는 메시지를 읽었다.
[서울 남부 관할, 영등포구 문래동 폐공장 인근. 남성 사체 발견. 신원 확인 중. 현장 사진 내 ‘겨울매화’ 유사 표식 확인. 관련 가능성 있음.]
차휘의 턱이 굳었다. “영등포입니다.”
이철규는 모니터를 끄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가져와.”
“공식 출동입니까?”
“아직 아니야.”
“그럼 더 빨리 가야겠군요.”
차휘는 이미 문 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이철규는 그의 등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탁강래에게 보고해야 했다. 적어도 절차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지난 며칠 동안 절차는 너무 자주 누군가의 방패가 되었다. 문석표를 건드리지 말라는 명령, 백야를 빼라는 지시, 장천길 이름을 보고서에서 낮추라는 압박. 탁강래는 조직을 보호한다고 했지만, 이철규는 이제 그 말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보고는 나중이었다.
문래동의 새벽은 서울의 다른 곳보다 더 늦게 밝았다. 오래된 철공소와 인쇄소, 작은 창고들이 이어진 골목은 밤이 지나도 어둠을 쉽게 놓지 않았다. 셔터가 내려진 공장들 사이로 습한 쇳내와 기름 냄새가 배어 나왔고, 길가의 배수구에서는 오래된 물이 썩은 냄새를 풍겼다. 개표방송의 화려한 조명과 후보 캠프의 환호가 아직 기억에 남아 있는 새벽, 이곳은 전혀 다른 나라처럼 보였다.
경찰 통제선은 이미 설치되어 있었다. 노란 테이프가 골목 입구에 느슨하게 걸려 있었고, 순찰차 두 대와 과학수사 차량 한 대가 서 있었다. 그러나 분위기는 이상하게 느슨했다. 기자도 없었고, 현장에 나온 간부도 적었다. 일반 변사 사건으로 처리하려는 공기가 현장 전체에 깔려 있었다. 너무 빠른 결론의 냄새였다.
이철규와 차휘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골목 반대편에서 상황을 먼저 살폈다. 경찰 하나가 담배를 피우며 전화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통제선 안쪽에서 서류철을 들고 있었다. 건물은 폐업한 인쇄소였다. 간판은 반쯤 떨어져 있었고, 녹슨 셔터 옆에는 ‘임대 문의’라는 종이가 오래되어 누렇게 변한 채 붙어 있었다.
“여기입니다.” 차휘가 낮게 말했다. “영등포 메시지 때 사용된 좌표 범위 안쪽입니다.”
“현장팀에 우리 이름 올라갔나?”
“아직 아닙니다. 경찰이 먼저 잡았습니다.”
“누가 신고했지?”
차휘가 태블릿을 확인했다. “새벽 4시 22분, 근처 폐지 수거인이 신고. 문이 조금 열려 있었고 안에서 사람이 쓰러진 걸 봤다고 합니다.”
이철규는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 그런 우연은 늘 의심스러웠다. 정말 우연히 열려 있었는지, 누군가 발견되도록 열어 둔 것인지. 죽음은 감추는 방식보다 발견시키는 방식에서 더 많은 의도를 드러낼 때가 있었다.
두 사람은 신분증을 제시하고 통제선 안으로 들어갔다. 현장 경찰은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막지는 못했다. 국정원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을 긴장시키는 동시에 침묵하게 했다. 이철규는 그 침묵이 싫었다. 침묵은 협조처럼 보이지만, 때로는 모두가 책임을 피하기 위한 가장 안전한 자세였다.
인쇄소 안은 차갑고 어두웠다. 오래된 기계들이 천으로 덮여 있었고, 벽에는 잉크가 튄 자국이 굳어 있었다. 바닥에는 먼지와 종이 조각이 흩어져 있었다. 형광등 하나가 깜박이며 간신히 공간을 밝히고 있었고, 그 아래에 남자가 누워 있었다.
신원은 아직 공식 확인 전이라고 했지만, 이철규는 얼굴을 보는 순간 그를 알아보았다. 영등포 환승통로 CCTV에 잡혔던 남자. 보관함 앞에서 3초쯤 머뭇거리다 사라졌던 남자. 전국산업노동연맹 서울남부지부 주변에서 한때 활동했으나 최근 연락이 끊긴 인물. 이름은 박도윤이었다. 서른여섯. 인쇄소 노동자 출신. 몇 년 전 구조조정 뒤 배달과 일용직을 전전했고, 최근에는 온라인 노동 게시판에서 강경한 글을 여러 번 남겼다. 그러나 이철규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 이력은 그를 공작원으로 만들기엔 부족하고, 이용당한 사람으로 만들기엔 충분했다.
박도윤은 기계 옆 바닥에 반쯤 기대어 있었다. 손목 근처에는 얇은 붉은 실이 묶여 있었고, 셔츠 안쪽 주머니는 뒤집혀 있었다. 경찰은 현장에 남겨진 약병과 짧은 유서 형식의 메모를 근거로 자살 가능성을 보고 있었다. 메모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모든 것이 내 잘못이다. 더는 살 수 없다’고 적혀 있었다.
차휘가 이를 악물었다. “이게 유서라고요?”
현장 형사가 대답했다. “필적 감정은 해 봐야죠. 하지만 정황상…”
“정황상?” 차휘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선거 끝난 지 몇 시간 만에 영등포 메시지 관련자가 폐공장에서 죽었는데 정황상 자살입니까?”
이철규가 손을 들어 차휘를 막았다. “현장 훼손하지 마.”
차휘는 입술을 다물었지만 눈빛은 더 날카로워졌다.
이철규는 천천히 시신 주변을 살폈다. 그는 시신을 오래 보는 요원이 아니었다. 죽음은 필요한 만큼만 봐야 한다. 너무 오래 보면 감정이 판단을 먹고, 너무 짧게 보면 의도가 빠져나간다. 그는 바닥의 먼지, 기계 밑의 발자국, 문 쪽으로 난 희미한 끌림 자국, 시신의 오른쪽 손가락 끝에 묻은 회색 분말을 차례로 확인했다. 프린터 토너였다. 오래된 인쇄소라면 흔한 물질일 수 있었다. 하지만 손가락 끝에만 남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메모 원본.”
현장 형사가 투명 봉투에 든 메모를 내밀었다. 이철규는 봉투 너머로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글씨는 떨려 있었다. 하지만 떨림이 감정 때문인지, 누군가 따라 쓰게 만든 흔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종이 오른쪽 아래에 아주 작게 잉크가 번진 점이 있었다. 일반적인 얼룩처럼 보였지만, 이철규는 영등포 전단지 뒷면의 마이크로도트를 떠올렸다.
“확대경.”
차휘가 장비 파우치에서 작은 확대 렌즈를 꺼냈다. 이철규는 봉투 위로 렌즈를 대고 그 점을 보았다. 점은 단순한 얼룩이 아니었다. 아주 미세한 다섯 갈래 선이 안쪽에서 뻗어 있었다. 겨울매화 표식. 붉은 겨울이 남긴 흔적과 닮아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표식의 배열이 영등포 보관함에서 봤던 것과 미세하게 달랐다. 겨울매화라기보다, 누군가 겨울매화를 흉내 낸 모양이었다. 너무 정교하지 못해서 이상한 게 아니라, 일부러 약간 틀리게 만든 듯한 이상함이었다.
이철규는 낮게 말했다. “이건 붉은 겨울이 직접 남긴 표식이 아니야.”
차휘가 곧바로 물었다. “그럼 누가요?”
“붉은 겨울로 보이게 만들고 싶은 사람.”
그 말이 인쇄소 안의 공기를 더 차갑게 만들었다. 현장 경찰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누군가는 못 들은 척했고, 누군가는 들었지만 모른 척했다.
그때 문밖에서 낮은 소란이 일었다. 검은 코트를 입은 경찰 간부 한 명이 골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석표였다. 그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주변을 훑어보았고, 이철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미세하게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곧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국정원에서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철규는 짧게 답했다. “저희도 경찰에서 이렇게 빨리 결론 내릴 줄은 몰랐습니다.”
문석표의 입꼬리가 조금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 “아직 결론 낸 거 아닙니다. 초기 판단입니다.”
“초기 판단치고는 언론에 나갈 문장이 너무 빨리 정리돼 있더군요.”
문석표의 눈빛이 잠깐 날카로워졌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군요.”
“‘선거 관련 의혹에 부담 느낀 노동계 인사 추정 자살.’ 지금쯤 어느 사회부 기자 휴대전화에 그런 문장 들어갔을 겁니다.”
문석표는 침묵했다. 그 침묵만으로도 이철규는 충분했다.
차휘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 박도윤입니다. 영등포 메시지와 연결된 인물입니다. 일반 변사 아닙니다.”
문석표는 차휘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젊은 분은 말이 빠르군요.”
“죽은 사람보다 산 사람 입이 더 빠른 법이죠.”
“차휘.” 이철규가 다시 그를 막았다.
문석표는 시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시기입니다. 확대하면 오히려 더 큰 혼란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선 자살 가능성을 열어 두고 조용히 확인하는 게 맞습니다.”
“누구에게 맞습니까?” 이철규가 물었다.
문석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순간 이철규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는 탁강래였다. 이철규는 화면을 보고 잠시 멈췄다. 전화를 받으면 들을 말은 뻔했다. 지금 위치가 어디냐. 현장에서 빠져라. 경찰 사안으로 남겨라. 선거 직후 국정원 개입으로 보이면 안 된다. 그 말들 모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일 것이다. 맞는 말은 언제나 가장 편리한 은폐의 옷이 되기도 했다.
그는 전화를 받았다.
“이철규입니다.”
탁강래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현장에 있나?”
“그렇습니다.”
“빠져.”
예상했던 말이었지만, 실제로 들으니 더 차가웠다.
“사망자는 영등포 메시지와 연결된 인물입니다. 현장에 겨울매화 유사 표식이 있고, 조작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건 경찰이 확인한다.”
“경찰 쪽에 문석표가 와 있습니다.”
“그래서 더 빠지라는 거야.”
이철규는 문석표 쪽을 바라보았다. 문석표도 전화를 받는 그를 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시신 하나가 놓여 있었다. 죽은 사람은 말하지 못했고, 산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었다.
“국장님.”
“말해.”
“이건 누군가 정리한 겁니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말단 연결고리를 끊었습니다. 자살로 닫으면 다음 사람이 죽습니다.”
전화 너머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탁강래는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 침묵이 더 위험했다.
“철규야.”
그가 이름을 불렀다. 직함이나 코드명이 아니라 이름을. 이철규는 그럴 때마다 탁강래가 어떤 결정을 이미 끝낸 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가는 진실을 다뤄야 할 때가 있고, 진실이 터지는 시간을 늦춰야 할 때가 있다.”
“진실이 늦춰지는 동안 사람이 죽었습니다.”
“한 사람이 죽었다고 판 전체를 터뜨릴 수는 없다.”
이철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은 잔인했지만, 정보기관 안에서 오래 일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본 논리였다. 한 사람과 국가. 한 사건과 판 전체. 작은 진실과 큰 안정. 문제는 언제나 그것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국가라는 이름 뒤에 숨긴다는 데 있었다.
“철수해. 현장자료는 받되, 공식 개입은 하지 마. 보고서에는 장천길, 백야, 사슴눈 모두 빼라.”
“사슴눈도 빼라고요?”
탁강래가 잠시 멈췄다. “네 코드명까지 보고서에 올릴 필요는 없다.”
“제 코드명을 상대가 먼저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빼라는 거다.”
전화가 끊겼다.
이철규는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차휘는 그의 표정을 읽고 있었다. 문석표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현장 형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시신 이송 준비하고, 유서 원본은 감정팀으로. 언론 대응은 변사 가능성으로 낮춰.”
차휘가 낮게 욕설을 뱉었다. “진짜 덮을 생각입니다.”
“아직 아니야.”
“아직이 아니라 이미입니다.”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신 옆에 쪼그려 앉았다. 박도윤의 오른손은 어색하게 말려 있었고, 손톱 밑에는 회색 가루와 함께 아주 작은 검은 섬유 조각이 끼어 있었다. 그는 현장 감식요원이 지나치기 전에 그것을 보았다. 아주 미세한 검은색 실. 일반 옷감일 수도 있었지만, 이철규는 검은 팔찌 남자의 손목을 떠올렸다. 그 팔찌는 가죽이 아니라 가느다란 합성섬유를 여러 겹 엮은 물건이었다.
그는 감식요원에게 말했다. “손톱 밑 섬유 채취하세요.”
감식요원은 문석표 쪽을 먼저 봤다. 이철규는 그 시선만으로도 이 현장의 지휘권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문석표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채취해.”
그러나 이철규는 그 표본이 나중에 사라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중요한 사건에서는 가끔 너무 쉽게 일어난다.
그때 차휘가 조용히 이철규의 팔을 건드렸다. 그는 인쇄기 뒤쪽 바닥을 가리켰다. 먼지 속에 무언가 희미한 자국이 있었다.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이철규는 장갑을 낀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찢어진 사진의 일부였다. 모서리만 남아 있었고, 그 안에는 흐릿한 사람의 어깨와 코트 깃, 그리고 뒤편에 러시아어 간판처럼 보이는 글자의 일부가 찍혀 있었다. 사진 뒷면에는 연필로 숫자 세 개가 적혀 있었다.
91-2 / K.Y.H. / return
강윤호. 또 그 이름이었다. 박도윤의 죽음 앞에서도, 선거의 밤 뒤에도, 누군가는 여전히 1991년으로 돌아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건 현장 증거입니다.”
“그래서 보관하겠습니다.”
“경찰이 보관합니다.”
“국가안보 관련 가능성이 있습니다.”
문석표의 얼굴이 굳었다. “국정원이 선거 직후 변사 사건을 안보 사건으로 가져가겠다고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아니요.” 이철규가 말했다. “저는 지금 사람이 죽었다는 의미밖에 모르겠습니다.”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마주 보았다. 문석표의 눈빛에는 짜증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그는 이 사건을 덮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자신도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보였다. 이철규는 그 차이를 기억해 두었다. 악인은 보통 느긋하다. 겁먹은 악인은 누군가의 말이다.
시신이 이송되기 전, 이철규는 박도윤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신념에 불타는 얼굴도, 공작원의 얼굴도 아니었다. 겁에 질린 채 너무 늦게 자신이 어떤 판에 들어왔는지 알게 된 사람의 얼굴. 아마 그는 자신이 무엇을 옮겼는지, 누구에게 이용당했는지 끝까지 몰랐을지도 모른다. 영등포 환승통로에서 보관함 앞에 섰던 3초, 그 짧은 망설임이 그의 마지막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인쇄소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조금 밝아져 있었다. 새벽빛은 골목의 더러움을 지우지 못했다. 오히려 밤에 가려져 있던 녹슨 철문과 갈라진 콘크리트, 젖은 쓰레기봉투를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차휘는 차 문을 세게 닫았다.
“명령대로 빠질 겁니까?”
이철규는 대답 대신 담배꽁초 하나가 굴러가는 바닥을 보았다.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그러나 문래동 골목, 워싱턴 행사장 밖 가로등 아래 남자, 송민희가 봤던 반쯤 꺼진 담배. 서로 다른 장면들이 이상하게 겹쳤다. 누군가는 항상 먼저 서 있었고, 누군가는 항상 나중에 도착했다.
“차휘.”
“예.”
“박도윤 주변 인맥 다시 파. 노동단체 공식 라인은 건드리지 말고, 게시판, 배달 일, 인쇄소 동료, 휴대전화 중고거래 내역까지. 누가 처음 접근했는지 봐.”
차휘의 눈빛이 살아났다. “비공식입니까?”
“공식으로 올리면 사라진다.”
차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 방식대로 해도 됩니까?”
이철규는 그를 바라보았다. 차휘의 방식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다. 빠르고 거칠고, 때로는 위험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길이 이미 위험했다.
“선을 넘지 마.”
“선이 어디까지입니까?”
이철규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다면 정보기관은 덜 위험한 곳이었을 것이다.
“사람을 잃고도 네가 너로 남을 수 있는 곳까지.”
차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그에게 충분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시각 장천길은 집무실 소파에서 잠들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당선 축하 꽃다발은 방 한쪽에 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아직 열지 않은 축하 문자가 수백 개 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승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밤새 지역 당원들과 지지자들이 다녀갔고, 방송국에서 전화가 왔고, 당 지도부에서 짧은 축하 인사가 왔다. 모두가 이겼다고 말했다. 아무도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노민지는 창가에 서 있었다. 그녀도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지명길은 컴퓨터 앞에서 후원회 명단과 USB 자료를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세 사람 사이에는 말이 거의 없었다. 당선의 기쁨이 있어야 할 방 안에는, 다음 공격이 언제 시작될지 기다리는 사람들의 피로만 남아 있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장천길의 개인 번호였다. 그는 발신자 표시를 확인하고 눈썹을 찌푸렸다. 번호 없음. 전날 밤에도 번호 없는 전화가 왔었다. 살아남았으면 이제 빚을 갚아야지. 그 목소리가 아직 귀에 남아 있었다.
노민지가 돌아보았다. “받지 마십시오.”
장천길은 휴대전화를 바라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장천길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한동안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잡음만 있었다. 오래된 공중전화나 지하 통로에서 들릴 법한, 낮고 불규칙한 잡음. 그리고 아주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첫 번째가 죽었습니다.”
장천길의 손이 굳었다. 노민지가 그의 표정을 보고 한 걸음 다가왔다. 지명길도 고개를 들었다.
“누구냐.”
“당신이 기억해야 할 사람은 아직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하지만 곧 기억하게 될 겁니다. 백야가 시작될 때, 늘 먼저 죽는 사람은 이름이 없는 사람입니다.”
장천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윤호냐?”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웃지 않았다. 그래서 더 섬뜩했다.
“강윤호는 죽을 순서가 아닙니다.”
전화가 끊겼다.
방 안의 공기가 무너진 듯했다. 노민지가 낮게 물었다. “무슨 말입니까?”
장천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입술이 조금 떨렸다. 지명길은 급히 문을 잠갔고, 노민지는 창밖을 확인했다. 국회 의원회관 주변은 아침 햇빛 속에 평온해 보였다. 평온한 곳에서 가장 무서운 전화가 걸려오는 법이었다.
“누가 죽었대.” 장천길이 말했다.
“누가요?” 지명길이 물었다.
“모른다.”
노민지는 장천길의 손에 쥔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그 전화, 바로 넘겨야 합니다. 통화 기록부터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 넘기지?” 장천길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경찰? 국정원? 언론? 지금 그 셋 중 어디를 믿으라는 거야?”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그날 오전 8시 12분, 첫 속보가 떴다.
[속보] 영등포 폐공장서 30대 남성 숨진 채 발견…경찰 “선거 관련 의혹과 직접 관련성 확인 안 돼”
8시 19분, 두 번째 속보가 제목을 바꾸었다.
[단독] 숨진 남성, 노동단체 주변 활동 이력…장천길 후원회 의혹 제보자 가능성
8시 26분, 권유라가 진행하는 아침 시사 프로그램 자막은 더 빨랐다.
“장천길 의혹, 첫 사망자까지…정치권 폭풍 불가피”
송민희는 회사 편집국에서 그 자막을 보았다. 그녀는 커피를 들고 있었지만 마시지 못했다. 밤새 거의 잠을 자지 못한 눈으로 화면을 바라보며, 자신이 처음 장천길 기사를 썼던 순간을 떠올렸다. 문장 하나, 제목 하나, 빠진 단어 하나가 어떻게 사람들의 의심을 만들었는지. 그리고 이제 그 의심의 주변에서 사람이 죽었다.
배철중은 옆에서 침착하게 말했다. “움직여. 영등포 현장, 경찰, 장천길 캠프, 노동단체. 네 명 붙여.”
송민희가 그를 돌아보았다. “너무 빠릅니다.”
“뭐가?”
“사망자 신원도 제대로 안 나왔는데 방송 자막이 이미 장천길로 붙고 있어요.”
배철중은 피곤한 얼굴로 웃었다. “세상은 원래 그렇게 붙어. 기자는 따라가는 거고.”
“아니요. 누가 붙이고 있습니다.”
그 말에 배철중의 웃음이 아주 조금 멈췄다. 그는 송민희를 바라보았다. “워싱턴 갔다 오더니 감이 너무 좋아졌나, 아니면 너무 예민해졌나?”
송민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메일 알림이 떴다. 발신자 없음. 제목 없음. 본문에는 단 한 줄만 적혀 있었다.
첫 번째 죽음은 기사가 아니라 신호입니다.
첨부파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한 줄이면 충분했다. 누군가는 그녀가 이 죽음을 어떻게 읽을지 기다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 이철규는 차 안에서 박도윤의 현장 사진을 다시 확인하고 있었다. 찢어진 사진 조각, 겨울매화 유사 표식, 손톱 밑 검은 섬유, 너무 빨리 준비된 자살 프레임, 문석표의 침묵, 탁강래의 철수 명령. 모든 것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듯했지만, 그 방향 끝에는 아직 사람의 얼굴이 없었다.
차휘가 운전석에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합니까?”
이철규는 한참 뒤에 대답했다. “죽은 사람 이름부터 제대로 되찾는다.”
“박도윤 아닙니까?”
“아니.”
이철규는 현장 사진 속 시신의 손목을 확대했다. 붉은 실 아래, 아주 희미한 문신 자국이 있었다. 오래되어 거의 지워진 숫자. 17.
“박도윤이라는 이름도 누가 준비해 준 이름일 수 있어.”
차휘가 브레이크를 밟을 뻔했다. “신원까지 가짜라는 겁니까?”
“확인해야지.”
그 순간 이철규의 보안폰이 울렸다. 화면에는 발신자 표시 대신 내부 경고 문구가 떠 있었다.
UNREGISTERED NODE.
그는 잠시 화면을 보고 있다가 전화를 받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몇 초 뒤, 기계음처럼 변조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슴눈.”
차휘가 고개를 돌렸다.
“첫 번째는 죽었고, 두 번째는 이미 걷고 있다.”
이철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백야는 끝난 적이 없다.”
뚝.
전화가 끊겼다.
차 안은 한동안 조용했다. 차휘의 손이 운전대를 꽉 쥐고 있었다. 이철규는 보안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통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전화가 걸려온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는 창밖을 보았다. 아침 햇빛이 서울의 빌딩 유리에 반사되고 있었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출근길 버스에 올랐고, 누군가는 편의점에서 삼각김밥을 샀고, 누군가는 포털에서 당선자 명단을 훑었다. 그들 대부분은 밤새 어떤 이름 없는 사람이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알아도 곧 잊을 것이다. 죽음은 뉴스가 되고, 뉴스는 다른 뉴스에 밀려난다.
그러나 이철규는 알았다. 이 죽음은 밀려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박도윤 혹은 박도윤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남자의 죽음은 첫 번째 경고였고, 첫 번째 청소였으며, 첫 번째 보고서였다.
그리고 보고서를 받은 사람은 이제 선택해야 했다.
덮을 것인가.
읽을 것인가.
이철규는 보안폰을 꺼 버렸다.
“차 돌려.”
차휘가 물었다. “어디로 갑니까?”
“박도윤이 마지막으로 살았던 방.”
“명령은요?”
이철규는 대답 대신 안전벨트를 다시 맸다. 차휘는 더 묻지 않고 핸들을 돌렸다. 검은 차는 출근 차량들 사이로 조용히 끼어들었다. 도시의 아침은 평범했고, 그래서 더 위험했다.
뒤쪽 차선의 회색 승용차 한 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붙었다. 차휘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이철규는 사이드미러 속 흐릿한 번호판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주머니 속에서 아직 꺼지지 않은 또 다른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