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2부 가짜 평화 (21화)

 

제2부 가짜 평화

제1장 승자의 고립

제1절 당선 후의 침묵



당선 다음 날 아침, 장천길 의원실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전날 밤만 해도 그곳은 사람의 체온과 목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벽마다 붙은 개표 상황판, 바닥에 아무렇게나 놓인 생수병과 종이컵,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터졌던 박수, 누군가 울먹이며 끌어안던 장면, 지지자들이 복도까지 밀려와 흔들던 작은 손팻말들. 밤새 사무실은 선거운동본부라기보다 임시 야전병원 같았다.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고, 누군가는 휴대전화를 붙든 채 이겼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그 모든 것이 빠르게 식었다.

축하 화환은 문 앞에 늘어서 있었지만, 꽃잎은 이미 힘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빨간 리본과 파란 리본, 금색 글씨로 적힌 축하 문구들이 복도 양쪽을 가득 채웠지만 그 글자들은 어쩐지 빈말처럼 보였다. 선거사무소에서 급히 옮겨 온 박스들은 아직 뜯기지 않은 채 회의실 벽에 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식은 커피와 반쯤 남은 김밥, 누군가 잊고 간 선거운동용 장갑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승리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승리의 열기는 없었다.

장천길은 자신의 방 안쪽 소파에 앉아 있었다. 잠은 한 시간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개표 막판의 숫자가 다시 떠올랐고, 눈을 뜨면 휴대전화 화면이 불길처럼 번쩍였다. 축하 메시지는 계속 들어왔다. 오래된 동창, 지역구 유지, 당내 인사, 시민단체 관계자, 언론사 데스크,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기업인들. 메시지들은 하나같이 정중했다. 축하드립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국민의 선택입니다. 앞으로 큰 역할 기대합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중 진짜로 기뻐하는 사람의 문장은 거의 없었다.

정치는 이긴 사람에게 축하를 보내는 일이 아니라, 이긴 사람의 다음 쓰임새를 계산하는 일이었다. 장천길은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날 아침만큼은 그 지식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는 휴대전화를 뒤집어 놓고 창밖을 보았다. 국회 잔디밭 위에는 이른 아침 햇빛이 낮게 깔려 있었다. 밤새 비가 조금 내렸는지 보도블록은 축축했고, 청소 노동자 한 명이 현수막 끈을 정리하고 있었다. 선거는 끝났지만 선거의 쓰레기는 남아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들어와.”

지명길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는 어제 입었던 정장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셔츠 깃은 구겨졌고, 넥타이는 풀린 채 주머니 안쪽에 반쯤 들어가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눈만은 지나치게 또렷했다. 밤새 잠을 자지 않은 사람의 눈이었다.

“의원님, 조간 모아 왔습니다.”


 지명길은 신문 묶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장천길은 바로 손을 대지 않았다. 이미 제목이 어떤 식으로 나왔을지 알 것 같았다. 승리보다는 의혹, 당선보다는 상처, 표 차보다는 생존. 요즘 신문 제목은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 사건이 어떤 감정으로 소비되어야 하는지를 먼저 정한다.

지명길이 맨 위 신문을 펼쳤다.

〈장천길, 1,043표 차 신승… 의혹 속 생환〉

다른 신문은 더 노골적이었다.

〈변절자 프레임 뚫고 살아남은 장천길, 차기 행보는?〉

방송사 온라인판 제목은 이미 칼끝을 바꿔 들고 있었다.

〈상처 입은 당선자, 자유우국당의 자산인가 부담인가〉

장천길은 세 번째 제목에서 시선을 멈췄다. 상처 입은 당선자. 워싱턴에서 시작된 말인지, 서울에서 만들어진 말인지 알 수 없는 표현이 이제 공개적인 제목이 되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누군가 조용히 흘렸고, 누군가는 그것을 받아 적었고, 이제는 모두가 자기 생각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상처 입은 당선자라.”

그는 낮게 중얼거렸다.

지명길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길아.”

“예, 의원님.”

“우리가 이긴 게 맞나?”

지명길은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예전 같았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의원님은 이기셨습니다. 국민이 선택했습니다. 이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 그런 말은 보좌관이 해야 하는 위로이고, 정치인이 듣고 싶은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지명길은 그날 아침 그 말을 하지 못했다.

“표로는 이기셨습니다.”

장천길은 희미하게 웃었다. “정치인이 표로 이겼는데도 그렇게 말하면, 그건 이미 진 거지.”

“아닙니다.” 지명길이 급히 말했다. “진 건 아닙니다. 다만…”

“다만?”

“상대가 의원님을 떨어뜨리려 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장천길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지명길을 바라보았다. 지명길은 두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그 손끝은 약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을 왜 지금 하지?”

“어젯밤부터 그렇게 느꼈습니다.”

“느낌인가, 자료인가.”

지명길은 입술을 다물었다. 검은 USB의 존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아직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장천길은 즉시 전부를 공개하려 할 것이고, 그러면 누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있는지 역으로 노출될 수 있었다. 지명길은 자신이 지금 충성을 하고 있는지 배신을 준비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이 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모든 것을 한꺼번에 믿는 일이었다.

“자료가 될 수도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장천길은 그 애매한 대답을 놓치지 않았다.

“너 나한테 숨기는 게 있구나.”

지명길은 고개를 들었다. “의원님을 속이려는 게 아닙니다.”

“속이려는 사람들은 대개 그 말을 먼저 하더라.”

방 안의 공기가 잠시 굳었다. 그러나 장천길의 목소리는 화난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나치게 지쳐 있었다. 지명길은 그 피로 속에 섞인 서운함을 느꼈다. 그것이 더 아팠다.

그때 바깥에서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노민지가 태블릿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전날 밤과 같은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피로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화장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머리도 단정했다. 지명길은 가끔 노민지가 잠을 자는 사람인지 의심했다. 그녀는 피로를 감추는 것이 아니라 피로를 자료처럼 관리하는 사람 같았다.

“아침 회의 10분 뒤로 잡았습니다.”

노민지는 방 안의 분위기를 한눈에 읽었지만 모른 척했다. “지역 조직 쪽 감사 인사, 당 지도부 전화 일정, 방송 인터뷰 요청, 그리고 온라인 대응 방향까지 정리해야 합니다.”

장천길은 신문 제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온라인 대응 방향이라면, 이 말도 대응하나?”

노민지는 화면을 내려다보지 않고 대답했다. “대응하지 않는 게 낫습니다.”

“왜?”

“반박하면 그 표현을 우리 입으로 다시 확산시키는 셈입니다. 상처 입은 당선자라는 말은 부정한다고 없어지는 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정 기간은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가 상처 입었다는 걸 인정하라는 뜻인가?”

“정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지명길이 끼어들었다. “그건 너무 위험합니다. 상대가 만든 프레임을 왜 우리가 받아들입니까?”

노민지는 지명길을 보았다. “프레임은 부수는 게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지금 의원님은 억울한 피해자처럼 보이면 안 됩니다. 살아남은 사람처럼 보여야 합니다. 당내에서는 공격받아도 죽지 않는 사람, 당 밖에서는 의혹을 견뎌낸 사람. 그 이미지가 필요합니다.”

“그럼 의혹은요?”

“의혹은 남깁니다.”

“뭐라고요?”

“완전히 해소하려고 달려들면 더 묶입니다. 지금은 답을 다 내놓는 시간이 아닙니다. 질문의 주도권을 다시 가져오는 시간이죠.”


지명길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노 보좌관님은 자꾸 의혹을 관리 대상으로 봅니다. 사람들은 의원님이 진짜 뭘 했는지 궁금해합니다. 우리가 모르는 자료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강윤호, 백야, 후원회, 동부선. 이게 다 단순 프레임입니까?”

노민지의 눈빛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강윤호라는 이름이 나왔을 때였다. 장천길은 그 짧은 흔들림을 보았다. 못 본 척하지 않았다.

“민지야.”

노민지는 천천히 장천길을 바라보았다.

“강윤호를 알아?”

“기록에서 본 이름입니다.”

“기록 말고.”

“직접 아는 사람은 아닙니다.”

지명길은 그녀를 노려보았다. “직접 본 적도 없습니까?”

노민지는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길지 않았지만, 방 안의 세 사람에게는 충분히 길었다.

“그 질문은 지금 여기서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필요가 없어요, 아니면 답하기 싫어요?”

“지 보좌관님.” 노민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 의원님 방에서 서로를 찢기 시작하면 밖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은 박수 칠 겁니다.”

장천길은 손을 들어 두 사람을 멈췄다. “그만.”

그는 소파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몸이 한순간 휘청거렸다. 지명길이 반사적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장천길은 손짓으로 막았다.

“이긴 다음 날 아침부터 우리끼리 의심하고 있군.”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명길도 고개를 숙였다.

“좋아. 그럼 의심을 안 할 수 있을 만큼 각자 가져온 걸 내놔. 민지는 오늘 안에 온라인 확산 경로와 방송 패널 라인 정리해. 명길이는 후원회 자료와 USB 관련해서 네가 아는 것 전부 별도 보고서로 써.”

지명길의 얼굴이 굳었다. 장천길은 그 변화를 보고도 모르는 척하지 않았다.

“USB라는 말은 안 했는데.”

지명길은 숨을 삼켰다.

장천길은 희미하게 웃었다. “내가 네 얼굴을 몇 년을 봤는데. 네가 뭘 숨길 때 왼쪽 손목을 만지는 버릇도 아직 못 고쳤더라.”

지명길은 자기도 모르게 손목에서 손을 떼었다.

노민지는 그 장면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놀람보다 계산이 먼저 떠올랐다. 장천길이 USB의 존재를 눈치챘다면, 이제 시간표는 바뀐다.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회의실로 가죠.”

장천길은 신문을 접었다. “축하는 나중에 받고, 먼저 살아남는 방법부터 정하자.”

회의실에는 보좌진 다섯 명과 지역 조직 담당자 두 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 피곤한 얼굴이었다. 한쪽 벽면 모니터에는 밤새 업데이트된 뉴스 헤드라인과 검색어 순위가 떠 있었다. 1위 장천길. 2위 변절자. 3위 강윤호. 4위 백야. 5위 상처 입은 당선자. 6위 자유우국당 내분. 7위 대통민정당 논평. 8위 참의당 진상규명 요구.

노민지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넘겼다.

“패턴은 세 갈래입니다. 첫째, 대통민정당 외곽 계정들이 변절자 프레임을 계속 밀고 있습니다. 둘째, 자유우국당 내부 익명 채널에서 의원님을 당 부담으로 규정하는 글이 반복됩니다. 셋째, 출처 불명의 계정들이 강윤호와 백야를 묶습니다. 문제는 세 갈래가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중간에 같은 문장을 공유합니다.”

그녀가 화면을 멈췄다.


〈살아남은 자는 설명해야 한다.〉


같은 문장이 서로 다른 진영의 계정에서 시간차를 두고 올라와 있었다. 대통민정당 지지 성향 커뮤니티, 자유우국당 내부 익명 게시판, 참의당 주변의 진보 논객 계정, 정체불명의 해외 한인 계정. 정치적 색깔은 달랐지만 문장은 같았다. 너무 같아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웠다.

“이 문장 누가 처음 썼어?” 장천길이 물었다.

노민지는 화면을 확대했다.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 게시자는 ‘EastRiver_91’이라는 계정입니다.”

지명길이 낮게 말했다. “동부선?”

노민지는 대답 대신 다른 화면을 띄웠다. 계정의 생성일은 불과 사흘 전이었다. 팔로워는 거의 없었고, 글은 열두 개뿐이었다. 그런데 그 열두 개의 글이 이상했다. 모두 장천길 관련 해시태그를 달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비난보다는 질문의 형태였다.


왜 그는 살아남았는가.

왜 그는 말하지 않는가.

누가 그의 이름으로 겨울을 건넜는가.


장천길은 마지막 문장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겨울을 건넜다는 표현은 너무 문학적이었다. 정치공세용 문장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누군가 과거를 알고 있거나, 적어도 과거를 알고 있는 척하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리며 당직자가 들어왔다. “의원님, 중앙당에서 연락 왔습니다. 오후 최고위원회의 뒤에 당선자 간담회가 있는데…”

그는 말끝을 흐렸다.

장천길이 물었다. “그런데?”

“명단에는 의원님 이름이 없습니다. 일단 비공개 실무 조율 중이라는데, 한도윤 의원실 쪽에서 따로 연락이 올 거라고…”

회의실 안이 조용해졌다. 당선자 간담회에 당선자의 이름이 없다는 것은 실수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치에서 그런 종류의 실수는 대개 실수가 아니었다. 당은 장천길을 당선자로 인정하되, 당의 얼굴로 세우지는 않겠다는 뜻이었다. 살아남았으나 초대받지 못한 승자. 그보다 더 정확한 고립의 방식은 없었다.

노민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공식 항의하지 마십시오.”

지명길이 돌아보았다. “왜요?”

“항의하는 순간 ‘장천길이 당내에서 자리 달라고 압박한다’는 프레임이 생깁니다. 지금은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낫습니다.”

장천길은 웃지 않았다. “기다리면 부르나?”

“안 부르면 안 부르는 쪽이 설명해야 합니다.”

그 말은 맞았다. 그러나 맞는 말이 늘 좋은 말은 아니었다. 장천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국회의사당 돔 위로 햇빛이 조금 더 올라와 있었다. 저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국민의 이름으로 싸우고, 타협하고, 배신하고, 다시 손을 잡는다. 그 모든 과정이 결국 침묵 속에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국민은 잘 모른다. 가장 중요한 결정들은 연단 위가 아니라 초대받지 못한 방의 문 앞에서 이루어진다.

점심 무렵, 한도윤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의외였다. 한도윤은 축하 인사를 남에게 맡기는 법이 없었다. 상대를 낮추고 싶을 때에도 직접 말을 걸어, 마치 자신이 예의를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장 의원, 축하합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정말 어려운 선거였습니다. 살아남으셨더군요.”

살아남았다. 장천길은 그 단어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축하 전화치고는 표현이 묘합니다.”

“요즘 정치에서 당선보다 중요한 게 생존 아닙니까.”

한도윤은 웃었다. “오후 간담회 건은 오해 없으셨으면 합니다. 지도부가 분위기를 좀 정리하려는 겁니다. 장 의원 이름이 너무 뜨거워졌어요.”

“내 이름이 뜨겁게 된 데 한 의원 쪽도 손을 보탰겠지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한도윤은 곧 다시 웃었다.

“정치에서 손 안 대고 뜨거워지는 이름은 없습니다. 다만 그 열을 견디느냐가 문제죠.”

“무슨 뜻입니까?”

“당분간 조용히 계시는 게 좋겠습니다. 언론 인터뷰 줄이고, 강윤호니 백야니 하는 말에는 답하지 마십시오. 당에서 정리할 수 있는 건 정리하겠습니다.”

“당에서?”

“우리는 같은 당 아닙니까.”

그 말이 가장 이상했다. 같은 당이라는 말은 친밀함의 표시가 아니라 경계선의 표시처럼 들렸다. 같은 당이니 따르라는 뜻이기도 했고, 같은 당이니 함부로 밖에 말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했다.

“한 의원.”

“예.”

“혹시 ‘동부선’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아주 짧은 정적이 있었다. 너무 짧아서 일반 사람이라면 놓쳤을 정적이었다. 그러나 장천길은 정치인의 호흡을 오래 들어온 사람이었다. 한도윤은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혹은 적어도 모르는 척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음 듣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 출처 불명의 단어에 반응하시면 안 됩니다. 지금 장 의원께 필요한 건 침묵입니다.”

전화는 부드럽게 끝났다. 하지만 장천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도 한참 동안 손을 떼지 않았다. 필요한 건 침묵. 아침부터 이상하게 같은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당은 침묵을 원했고, 언론은 침묵을 해석했고, 익명 계정은 침묵을 공격했다. 누가 말하느냐만 다를 뿐 모두가 그에게 같은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말하지 말라. 혹은 말하지 못하게 하라.

그 시각, 송민희는 신문사 정치외교부 자기 자리에서 장천길 관련 기사들을 나란히 띄워 놓고 있었다. 전날 밤 받은 익명 메일은 아직 삭제하지 못했다.


첫 번째 죽음은 기사가 아니라 신호입니다.


그 문장은 그녀의 메일함 깊은 곳에서 계속 반짝이는 것 같았다. 그녀는 박도윤이라는 이름을 검색했다. 아직 주요 언론에는 나오지 않았다. 경찰 출입기자 몇 명에게 문자를 넣었지만 답은 비슷했다. 문래동 폐인쇄소 변사 사건. 자살 추정. 정치 관련성 확인 안 됨. 문석표 라인에서 그렇게 정리하고 있다는 말도 들려왔다.


송민희는 모니터 오른쪽에 장천길 사진을 띄웠다. 당선 직후 웃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 웃음은 승자의 웃음이 아니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기자는 사진에서 문장을 뽑아내는 직업이다. 그날 그녀가 사진에서 읽은 문장은 간단했다.

이 사람은 지금 축하를 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포위되어 있다.

배철중이 그녀의 자리 뒤에 섰다. 민희는 인기척을 느꼈지만 바로 돌아보지 않았다.

“장천길 쪽 계속 보고 있지?”

“보고 있습니다.”

“좋아. 오늘 오후판은 당내 고립 쪽으로 가자. 제목은 대충 잡았어. ‘돌아온 장천길, 그러나 당은 침묵했다.’ 어때?”

민희는 의자에 기대지 않은 채 말했다. “너무 몰아가는 제목입니다.”

“제목은 몰아가라고 있는 거야.”

“박도윤 변사 사건도 확인해야 합니다.”

배철중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그 이름 어디서 들었어?”

“경찰 쪽에서요.”

“그거 아직 건드리지 마.”

“왜요?”

“정치 관련성 없어. 경찰도 그렇게 보고 있고.”

“경찰이 그렇게 본다는 것과 실제로 그런 건 다릅니다.”

배철중은 낮게 웃었다. “워싱턴 다녀오더니 너무 드라마틱해졌네.”

민희는 그를 돌아보았다. “국장님은 이 사건이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보십니까?”

“나는 사건을 본다기보다 판을 봐. 지금 판은 장천길 당내 고립이야. 죽은 사람 하나로 판을 흐리지 마.”

그 말은 기자의 말이 아니라 편집자의 말이었다. 그리고 편집자의 말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지시처럼 들렸다. 민희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기자는 사실이 판을 바꿀 수 있다고 믿고, 편집자는 판에 맞는 사실만 살아남는다고 믿는다. 배철중은 오래전부터 후자였다.

그가 자리를 떠난 뒤 민희의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발신자 번호 없음.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받았다.

“송민희입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몇 초 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낮고 건조한 남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선자의 침묵을 기사로 쓰지 마십시오.”

“누구시죠?”

“침묵은 그의 것이 아닙니다. 누가 그에게 침묵을 요구하는지 쓰십시오.”

“박도윤을 말하는 겁니까?”

상대는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 차휘 씨입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대신 아주 작은 웃음인지 숨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들렸다.

“사슴눈에게 말하십시오. 두 번째는 아직 살아 있다고.”

전화는 끊겼다.

민희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지 못했다. 그녀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카페에서 만났던 남자, 차휘. 그가 남긴 메모. 장천길을 먼저 의심하지 말라는 경고. 사슴눈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보라는 문장. 이제 또 다른 목소리가 같은 단어를 남기고 사라졌다. 두 번째는 아직 살아 있다. 그렇다면 첫 번째는 박도윤이고, 두 번째는 누구인가.

그 시간, 국정원 지하 연락분석실에서 이철규는 박도윤 사건 보고서의 수정본을 보고 있었다. 원본 제목은 〈문래동 폐인쇄소 변사 사건 관련 초기 현장 검토〉였지만, 상부 결재를 거친 뒤 제목은 〈일반 변사 사건 참고 보고〉로 바뀌어 있었다. 관련 인물 항목에서 장천길의 이름은 삭제되었고, 영등포 환승통로 작전과의 연계 가능성도 사라졌다. 붉은 겨울 표식은 ‘낙서 또는 개인 상징물’로 낮춰졌으며, 백야 관련 표기는 ‘확인 불가한 문자 조합’이 되었다.


     이철규는 수정본을 조용히 닫았다.

차휘가 옆에서 이를 갈듯 말했다. “누가 고쳤습니까?”

“상부.”

“상부가 누굽니까?”

이철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차휘는 의자를 밀치고 일어났다. “팀장님, 이건 사건을 덮는 게 아니라 사람을 지우는 겁니다. 죽은 사람 이름을 지우고, 본 사람이 본 걸 못 본 걸로 만드는 거잖습니까.”

이철규는 차휘를 보았다. “앉아.”

“싫습니다.”

“앉아.”

이번에는 목소리가 낮고 단단했다. 차휘는 몇 초 동안 버티다가 다시 앉았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거칠었다.

이철규는 폐쇄망 검색창에 단어 하나를 입력했다.


WOUNDED SURVIVOR.


검색 결과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 해외 싱크탱크 보고서에서 쓰는 일반적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중 하나가 이철규의 시선을 붙잡았다. 작성 기관은 동북아전략안정센터. 제목은 〈Post-Election Leverage Assessment: Korean Legislative Outcome〉. 작성일은 총선 사흘 전. 비공개 등급 문서였고, 출처는 불명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문서 첫 페이지에는 한 문장이 있었다.


A wounded survivor is more useful than a defeated man.

상처 입은 생존자는 패배한 사람보다 더 유용하다.


이철규는 화면을 껐다. 방 안이 잠시 어두워졌다가 다시 다른 모니터 불빛으로 희미하게 밝아졌다. 차휘는 그 문장을 보지 못했지만, 이철규의 표정이 바뀐 것을 보았다.

“뭡니까?”

“장천길은 목표가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럼 뭡니까?”

“결과물.”

차휘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이철규는 더 설명하지 않았다. 아직 설명할 수 없었다. 다만 이제 분명해졌다. 누군가는 선거 전에 이미 장천길이 패배하지 않고 상처 입은 채 살아남을 것을 전제로 다음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것은 예측이 아니라 설계에 가까웠다.

오후 세 시, 장천길 의원실에는 흰 난 화분 하나가 도착했다. 다른 축하 화환들처럼 과장되지 않았고, 리본도 작았다. 보낸 사람은 한도윤 의원실이었다. 리본에는 짧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생환을 축하합니다.


지명길은 그 문구를 보고 얼굴을 굳혔다. 노민지는 리본을 떼어내려 했지만 장천길이 막았다.

“놔둬.”

“의원님.”

“가끔 적이 보내는 말이 아군의 위로보다 정확할 때가 있어.”

그는 리본을 한참 바라보았다. 생환. 살아 돌아왔다는 말. 전쟁터에서나 쓰는 말. 선거는 전쟁이라는 말을 정치인들은 습관처럼 하지만, 선거가 정말 전쟁이 되는 순간은 드물다. 그런데 이번에는 누군가 처음부터 그것을 전쟁으로 설계한 듯했다.

노민지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그녀는 화면을 확인하고 즉시 뒤집었다. 그러나 장천길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누구야?”

“스팸입니다.”

“스팸을 그렇게 보고 뒤집나?”

노민지는 말하지 않았다. 지명길의 시선도 그녀의 휴대전화에 꽂혔다. 방 안에 다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번에는 선거 다음 날의 피로 때문이 아니라, 각자 숨기고 있는 것들의 무게 때문이었다.

노민지는 결국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 화면에는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

축하드립니다. 이제 베이징에서 뵙겠습니다.

발신자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노민지는 번호를 알고 있었다. 리정후였다.

그녀는 메시지를 지우지 않았다. 지우는 순간 더 큰 흔적이 남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화면을 꺼서 주머니에 넣었다. 장천길은 더 묻지 않았다. 그러나 묻지 않는다는 것이 모른다는 뜻은 아니었다.

저녁이 가까워질 무렵, 자유우국당 중앙당사에서는 당선자 간담회가 열렸다. 장천길은 초대받지 못했다. 방송 카메라는 당 지도부와 주요 당선자들의 악수를 비췄고, 한도윤은 화면 한가운데서 웃고 있었다. 장천길 의원실의 TV는 소리를 줄인 채 그 장면을 내보냈다. 누구도 채널을 돌리지 않았다. 그것은 모욕이었지만, 동시에 확인이었다. 장천길은 당선됐지만 당의 식탁에는 앉지 못했다.

장천길은 TV를 끄라고 하지 않았다. 그는 화면 속 한도윤의 웃음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이제 알겠군.”

지명길이 물었다. “무엇을 말입니까?”

“선거는 어제 끝났지만, 내 선거는 오늘부터 시작된 거야.”

그날 밤, 장천길 의원실의 불은 늦게까지 꺼지지 않았다. 복도에는 축하 화환의 향기가 아직 남아 있었지만, 사무실 안에서는 더 이상 축하라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지명길은 후원회 자료를 다시 열었고, 노민지는 베이징 메시지의 발신 경로를 따로 저장했으며, 장천길은 흰 종이를 앞에 두고 아무 말 없이 펜을 들었다. 그는 기자회견문도, 감사 인사문도 쓰지 않았다. 대신 종이 맨 위에 세 단어를 적었다.


강윤호.

백야.

동부선.


그리고 그 아래에 한 문장을 더 적었다.


누가 나에게 침묵을 요구하는가.


바로 그때, 의원실 대표 메일함으로 초청장 하나가 도착했다. 발신자는 동북아평화경제포럼. 제목은 정중했다.

〈한중 미래협력 비공개 라운드테이블 초청의 건〉

노민지는 화면을 확인하고 숨을 멈췄다. 지명길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천길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선거 다음 날의 침묵은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멀리서, 더 부드러운 이름으로, 더 위험한 문을 열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