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반도 - 2부 가짜 평화 (23화)

 

제2부 가짜 평화

제2장 베이징 초대장

제1절 경제협력 포럼


동북아평화경제포럼의 사전 브리핑은 서울 시내 어느 특급호텔 23층에서 열렸다. 정확히 말하면 브리핑이라기보다, 브리핑의 형식을 빌린 사전 선별 모임에 가까웠다. 공식 일정표에는 ‘차기 국회 동북아 경제협력 의제 설명회’라고 적혀 있었고, 초청장에는 산업 전환, 에너지 안보, 공급망 재편, 청년 교류, 지방정부 협력 같은 말들이 정갈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어느 단어 하나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깨끗했다. 그래서 장천길은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깨끗한 말일수록 더러운 손으로 잘 닦인 법이라고.

엘리베이터는 조용히 올라갔다. 층수를 알리는 작은 불빛이 하나씩 바뀔 때마다 장천길은 전날 밤의 전화를 떠올렸다. 살아남았으면 이제 빚을 갚아야지. 변조된 목소리인지, 오래된 기억 속 목소리인지 분간할 수 없었던 그 한마디는 잠을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새벽까지 의원회관 소파에 앉아 있었고, 아침에는 기자들의 질문을 피해 후문으로 나왔다. 당선의 축하는 이미 사라졌고, 남은 것은 숫자와 의심뿐이었다. 득표율, 검색량, 부정 기사 비율, 당내 비공식 평가, 수사 가능성. 정치가 숫자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하면 인간은 금세 표본으로 줄어든다.

노민지는 그의 왼쪽 뒤에 서 있었다. 평소처럼 단정한 검은 정장에 얇은 회색 목도리를 둘렀고, 손에는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벽면 광고판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한 뒤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오늘은 표정 관리가 중요합니다.”

장천길은 거울 속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 표정이 지금 그렇게 안 좋은가?”

“좋아 보이면 더 이상합니다.”

“그럼 어떻게 보이면 되지?”

“상처는 있지만 흔들리지는 않는 사람. 그리고 아직 쓸모 있는 사람.”

노민지의 말은 늘 이랬다. 인간을 문장으로 보지 않고 포지션으로 보았다. 장천길은 가끔 그 점이 섬뜩했지만, 바로 그 능력 때문에 그녀를 곁에 두었다. 정치판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잘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남들이 자기를 어떤 물건으로 분류하는지 빨리 알아차리는 사람이었다.

“쓸모라.” 장천길이 낮게 중얼거렸다. “결국 나도 물건이군.”

“정치인은 원래 상품입니다. 다만 팔리는 상품과 버려지는 상품이 있을 뿐입니다.”

노민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장천길은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냉정함이 지금은 필요했다. 지명길은 아직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검은 USB를 들고 사라진 이후, 그는 전화도 메시지도 받지 않았다. 보좌관 하나가 사라졌는데 경찰에 신고할 수도, 당에 알릴 수도 없었다. 신고하는 순간 USB의 존재를 설명해야 했고, 설명하는 순간 장천길 의원실은 더 이상 피해자의 자리에 설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호텔 23층의 공기가 흘러들었다. 카펫은 지나치게 부드러웠고, 복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 벽에는 동양 산수화처럼 보이는 추상화가 걸려 있었고, 안내 직원들은 목소리를 낮춰 “이쪽입니다”라고 말했다. 문 앞에는 ‘동북아평화경제포럼 사전 라운드테이블’이라는 작은 표지가 놓여 있었다. 그 아래에는 주최 단체 이름이 셋 적혀 있었다.

화평아시아재단.

청해전략연구소.

미래공급망협의회.

세 이름 모두 얼마 전부터 장천길 주변에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이름들이었다. 노민지는 표지판을 보며 아주 잠깐 눈을 깜박였다. 너무 짧아서 다른 사람은 알아차리지 못했겠지만, 장천길은 보았다. 그녀가 저 이름들을 모를 리 없었다. 모른다면 무능한 것이고, 알고도 여기 온 것이라면 위험한 것이었다.

“민지 씨.”

“네.”

“이 셋이 한자리에 있는 게 우연인가?”

노민지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안내 직원이 가까이 있는지를 먼저 확인했다. “우연이라는 말은 정치에서 가장 비싼 거짓말입니다.”

“그럼 알고 있었군.”

“초청장 단계에서는 화평아시아재단만 전면에 있었습니다. 청해와 미래공급망은 어제 밤 최종 안내문에 들어왔습니다.”

“나한테는 왜 보고 안 했지?”

노민지는 장천길을 바라보았다. “보고하면 의원님은 안 오셨을 테니까요.”

그 대답은 변명이 아니었다. 결정이었다. 장천길은 잠시 그녀를 보았다. 노민지는 피하지 않았다. 그 순간 두 사람 사이에는 보좌관과 의원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두 정치인의 침묵이 놓였다.

“나를 덫으로 데려온 건가?”

“덫인지 확인하러 온 겁니다.”

“차이가 큰가?”

“덫이라도 누가 설치했는지 봐야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장천길은 짧게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숨이 새어 나온 것에 가까웠다. 

“지명길이라면 절대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을 거야.”

“그래서 지금 지 보좌관이 없습니다.”

그 말은 날카로웠다. 장천길은 더 묻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호텔 직원이 두 사람을 안으로 안내했다.

라운드테이블 룸은 넓지 않았다. 원형 테이블 세 개가 느슨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벽면 한쪽에는 한반도와 동북아 해상로를 단순화한 지도가 걸려 있었다. 지도에는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 대만, 동남아 해상로가 얇은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 선들은 물류 노선처럼 보였지만, 장천길에게는 군사 지도처럼 보였다. 바다는 무역의 길이기도 했지만, 전쟁이 오면 가장 먼저 잠기는 길이기도 했다.

참석자는 서른 명 남짓이었다. 대통민정당 의원 두 명, 자유우국당 의원 셋, 참의당 정책위원 한 명, 국민개혁연합의 젊은 비례대표 당선자, 몇몇 전직 외교관, 기업 대관 임원, 대학 교수, 싱크탱크 연구원, 그리고 이름표만으로는 정체를 짐작하기 어려운 재단 관계자들. 겉으로는 균형 잡힌 초청 명단이었다. 진보와 보수, 소수정당과 기업, 학계와 언론이 적당히 섞여 있었다. 그러나 정치인은 그런 균형을 믿지 않는다. 균형은 대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든 그림이다.

장천길이 들어서자 몇몇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축하보다 관찰에 가까웠다. 상처 입은 동물을 보는 사냥꾼의 시선, 혹은 아직 쓸 수 있는 말을 살피는 장사꾼의 시선. 대통민정당의 하서연 의원은 밝게 웃으며 먼저 다가왔다. 마흔다섯의 재선 의원인 그녀는 방송 토론에서 날카로운 말솜씨로 유명했고, 당내에서는 외교안보 라인의 차세대 주자로 꼽혔다.

“장 의원님, 당선 축하드립니다. 접전이 아주 드라마틱하더군요.”

장천길도 웃었다. “드라마는 보는 사람이 즐거워야 하는데, 당사자는 좀 힘듭니다.”

“정치는 늘 그렇죠. 보는 사람은 분석하고, 겪는 사람은 피 흘리고.”

하서연은 그렇게 말하며 그의 손을 잡았다. 악수는 길지도 짧지도 않았지만, 손가락 힘이 조금 강했다. 그녀는 가까이 다가와 낮게 덧붙였다.

“오늘 오신 건 잘하신 겁니다. 안 오셨으면 더 많은 말이 돌았을 거예요.”

“어떤 말입니까?”

“장 의원님이 베이징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겁을 낸다는 말이요.”

장천길은 미소를 유지했다. “그런 말을 누가 합니까?”

하서연은 대답 대신 테이블 반대편을 보았다. 그곳에는 한도윤이 서 있었다. 그는 장천길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고, 이미 몇몇 기업인과 가볍게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도윤은 장천길을 보자 잔을 들어 보였다. 생환을 축하합니다. 사흘 전 보낸 난 화분의 문구가 장천길의 머릿속에 다시 떠올랐다. 한도윤의 웃음은 여전히 너무 매끄러웠다.

“오늘은 이상한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하서연이 말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이상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까?”

하서연은 이번에는 정말 웃었다. “그 점에서는 장 의원님이 아직 감각이 살아 계시네요.”

그녀가 물러난 뒤, 노민지가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하서연. 대통민정당 외교안보위원회 간사. 당내 친평화 실용파로 분류됩니다. 베이징 쪽 학술 교류 경험 많고, 워싱턴 쪽 네트워크도 있습니다.”

“믿을 만한가?”

“정치인을 믿을 만한가로 분류하면 업무가 안 됩니다.”

“그럼?”

“오늘은 우리와 같은 불편함을 느끼는 쪽인지 봐야 합니다.”

장천길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실 앞쪽에서는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았다. 젊은 남자였다. 이름표에는 ‘임태준, 청해전략연구소 국제협력실장’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지나치게 또렷한 발음으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바쁘신 일정에도 동북아평화경제포럼 사전 라운드테이블에 참석해 주신 내외 귀빈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포럼은 단순한 경제협력 행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공급망 재편, 에너지 안보, 해상 교통로, 디지털 무역, 지방정부 교류라는 다섯 축을 통해 동북아의 새로운 평화 구조를 모색하고자 합니다.”

평화 구조. 장천길은 그 표현이 귀에 걸렸다. 평화라는 말은 아름답지만, 너무 자주 전략의 포장지로 쓰인다. 특히 동북아에서 평화는 누가 군함을 어디까지 보내고, 누가 반도체 장비를 누구에게 팔며, 누가 대만해협에서 침묵할 것인가를 둘러싼 다른 이름이 되곤 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첫 번째 발표자가 나왔다. 미래공급망협의회의 자문위원이라는 중년 여성이었다. 그는 세계 공급망 재편과 한국 기업의 위험 분산 전략을 설명했다. 발표 자료에는 반도체, 배터리, 희토류, 해상 물류, 러시아 극동 에너지, 대만 리스크라는 단어가 정교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정치적 표현은 피했지만, 그래프와 화살표는 정치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대만해협에 붉은 점선이 표시되고, 한국 남부 항만에서 일본 규슈와 대만 북부를 거쳐 남중국해로 내려가는 항로가 푸른 선으로 이어졌다. 그 아래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Contingency Corridor: Neutral Access Scenario.’


중립 접근 시나리오. 장천길은 그 문구를 보자마자 눈썹을 아주 조금 움직였다. 중립이라는 말은 대개 어느 편도 들지 않겠다는 뜻으로 들리지만, 국제정치에서는 종종 어느 편도 지키지 않겠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발표가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되자 참의당 정책위원 윤서경이 손을 들었다. 서른아홉의 그는 노동경제 전문가 출신으로, 짧은 머리와 굵은 안경이 인상적인 인물이었다.

“공급망 안정이라는 표현이 반복되는데, 발표 자료에는 노동자 안전이나 지역 산업 공동화 문제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평화를 말하면서 경제의 고통은 누가 부담하는지 묻지 않는다면, 이 포럼은 기업과 국가의 이해만 대변하는 자리가 됩니다.”

회의실 공기가 잠시 굳었다. 사회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눈은 웃지 않았다.

“좋은 지적입니다. 다음 세션에서 사회적 비용 분담 문제를 다룰 예정입니다.”

윤서경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다음 세션 자료도 봤습니다. 거기에도 비용은 있는데 사람은 없습니다.”

몇몇 참석자가 웃음을 삼켰다. 장천길은 처음으로 윤서경을 주의 깊게 보았다. 참의당은 숫자는 작았지만, 이런 장면에서 의외의 칼을 꺼낼 줄 알았다. 그러나 윤서경의 말이 끝난 직후, 테이블 구석의 한 남자가 메모를 적어 사회자에게 건넸다. 검은 뿔테안경, 짙은 회색 양복, 지나치게 평범한 얼굴. 장천길은 그 남자를 어디선가 본 듯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노민지의 손가락이 태블릿 가장자리에서 잠깐 멈췄다.

“아는 사람인가?” 장천길이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물었다.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늦게 대답하면 더 의심받는다는 걸 아는 사람답게, 그녀는 아주 짧게 말했다.

“리정후 쪽 사람입니다.”

“리정후 쪽?”

“오늘 명단에는 없었습니다.”

그 말이 더 중요했다. 명단에 없는 사람이 방 안에 있다. 장천길은 표정 변화 없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 남자는 메모를 건넨 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인 사람이 반드시 숨어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모두가 자기를 보지 않게 만들면서도, 자신은 모두를 보는 사람이 있다.

두 번째 세션은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기자와 일반 실무자들은 밖으로 나가고, 참석자 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문이 닫히자 사회자는 마이크를 끄고 육성으로 말했다.

“지금부터는 공식 기록에 남기지 않는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녹음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이 나오자 몇몇 보좌진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공식 기록에 남기지 않는 자리. 정치권에서 그런 말은 대개 기록보다 더 오래 남는 약속이 오가는 자리라는 뜻이었다. 노민지는 태블릿 화면을 껐다. 그러나 완전히 끈 것은 아니었다. 장천길은 그녀가 전원 버튼을 한 번 짧게 누른 것뿐이라는 걸 보았다. 그녀는 기록하지 않는 척하면서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는 사람이다.

한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쪽 보수 진영은 이런 말을 꺼내면 곤란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한국이 미중 사이에서 선택만 강요받는 구조로 가는 건 위험합니다. 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이라는 오래된 구도가 이미 무너졌는데, 아직도 국내 정치는 냉전식 구호로 표를 얻으려 하죠.”

장천길은 한도윤을 바라보았다. 저 말만 떼어 놓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문제는 누가, 왜, 지금 그 말을 하느냐였다.

하서연이 받았다. “대통민정당 내부도 단순하지 않습니다. 평화를 말하면 친중이라 하고, 동맹을 말하면 보수 따라간다고 합니다. 국민은 불안을 싫어하지만, 정치는 불안을 먹고 삽니다.”

윤서경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평화든 동맹이든, 결국 노동자와 시민에게 비용을 떠넘기는 구조라면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테이블의 방향이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보수 내부 실용파, 진보 내부 평화파, 소수정당의 사회경제 의제. 그 조합은 겉으로 보면 새로운 협치의 가능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장천길은 이상하게도 그 조합이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고 느꼈다. 누군가 서로 다른 색의 조각을 미리 골라 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 같았다.

그때 회의실 뒤쪽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중국계로 보이는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키는 크지 않았지만 자세가 반듯했고, 머리는 희끗희끗했으며, 얇은 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는 통역이나 기업인처럼 보일 수도 있었고, 교수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방 안의 몇몇 사람은 그를 보고 아주 미세하게 자세를 고쳤다. 사회자가 즉시 일어나 소개했다.

“잠시 특별 자문으로 참석하신 린웨이 박사님을 소개드립니다. 동북아 해상경제와 지역안보 분야에서 오랫동안 연구해 오신 분입니다.”

린웨이. 이름을 듣는 순간 노민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장천길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사라진 표정은 때로 놀란 표정보다 많은 것을 말한다.


   린웨이는 한국어로 말했다. 발음은 부드러웠지만 문장 끝이 아주 조금 딱딱했다. “여러분을 직접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 이 자리는 매우 중요합니다. 총선 이후 한국 정치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일지, 동북아 전체가 보고 있습니다.”

동북아 전체가 보고 있다. 워싱턴에서 켈러가 송민희에게 했다는 말과 닮은 문장이었다. 장천길은 아직 그 말을 들은 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등 뒤가 서늘해졌다.

린웨이는 발표 자료 없이 이야기했다. “한국은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이 자기 크기를 잘못 이해하면 위험해집니다. 너무 작다고 생각하면 남의 결정에 끌려가고, 너무 크다고 생각하면 감당 못할 약속을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균형입니다. 균형은 비겁함이 아니라 생존의 기술입니다.”

회의실은 조용했다. 그는 누구도 직접 공격하지 않았고, 어떤 국가도 노골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가 미국과 중국, 대만과 일본, 러시아를 동시에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가오는 10년, 동북아의 위험은 군사충돌 그 자체보다 충돌 가능성을 둘러싼 경제적 과민반응에서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반도체, 배터리, 항만, 에너지, 식량. 이 모든 것이 정치적 선택과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다음 정치 지도자들은 이념보다 복합적 위험을 이해해야 합니다.”

장천길은 ‘다음 정치 지도자들’이라는 표현에서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린웨이의 시선은 방 안을 고르게 훑었지만, 멈추는 지점은 정확했다. 장천길, 한도윤, 하서연, 그리고 윤서경. 서로 다른 당의 인물들이지만, 모두 각자의 진영에서 다음 세대를 대표할 수 있는 얼굴들이었다.

질문 시간이 되자 장천길은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러나 린웨이가 먼저 그를 불렀다.

“장천길 의원님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선거를 치르신 직후라 더 현실적인 감각이 있으실 것 같습니다.”

방 안의 시선이 장천길에게 모였다. 한도윤은 옅게 웃었고, 하서연은 펜을 들었다. 노민지는 아주 작게 고개를 숙였다. 말하지 말라는 뜻인지, 조심하라는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장천길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국 정치인이 국제정치를 말할 때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은, 우리가 모든 걸 선택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거짓말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고요.”

린웨이의 눈이 조금 밝아졌다.

“우리는 선택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다만 선택을 선언하는 방식과 비용을 줄이는 방식은 고민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균형이라는 말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균형은 흔들린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흔들리지 않는다고 거짓말하는 정치보다는, 흔들린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치가 낫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장천길은 자기가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있었다. 보수정당 의원으로서 너무 유연한 말이었고, 진보정당 인사에게는 충분히 애매한 말이었다. 언론에 나가면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기 좋은 문장이었다. 그러나 이 방에서는 다른 방식으로 들릴 것이다. 협상 가능한 사람. 상처 입었지만 아직 쓸모 있는 사람.

린웨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매우 흥미로운 말씀입니다.”

그 말이 칭찬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평가처럼 들렸다.

회의가 끝난 뒤, 참석자들은 다시 밝은 조명이 켜진 리셉션 공간으로 나왔다. 와인과 커피, 작은 샌드위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방금 전 비공개 세션에서 한 말을 전부 잊은 척하며 명함을 주고받았다. 언론에 공개될 사진을 위해 몇몇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장천길은 유리창 쪽으로 물러나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한강은 저 아래에서 낮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회로판처럼 보였다. 강과 도로와 다리와 건물, 그리고 그 사이를 흐르는 보이지 않는 신호들.

노민지가 다가왔다. “방금 발언은 위험했습니다.”

“그럼 하지 말라고 했어야지.”

“말리기엔 늦었습니다.”

“말린다고 안 했을까?”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낮게 말했다. “린웨이는 사람을 고를 때 직접 설득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신이 고른 사람이 스스로 말하게 만듭니다. 방금 의원님은 그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일부 해 버렸습니다.”

“그 사람을 잘 아는군.”

노민지의 입술이 아주 잠깐 굳었다. “소문을 압니다.”

“민지 씨, 언제부터 소문만으로 사람을 그렇게 정확히 설명했나?”

이번에는 노민지도 바로 답하지 못했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그때 누군가 장천길의 뒤에서 말했다. “정치인은 늘 자신을 설득한 사람이 누구인지 늦게 알게 됩니다.”

장천길이 돌아보자 린웨이가 서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웃음이 거의 없었다. 그는 노민지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노민지는 정중히 인사했지만, 손은 내밀지 않았다.

“의원님 말씀 인상 깊었습니다.” 린웨이가 말했다. “한국 정치에서 그런 현실 감각은 드뭅니다.”

“현실 감각이란 말은 칭찬입니까, 경고입니까?”

“둘은 자주 같은 말입니다.”

장천길은 웃었다. “그런 식의 말은 워싱턴 사람들도 좋아하더군요.”

린웨이는 잠시 멈칫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장천길은 보았다. 워싱턴이라는 단어가 그의 눈동자에 작은 흠집을 냈다.

“워싱턴도 동북아를 걱정합니다. 베이징도 그렇고, 도쿄도 그렇고, 타이베이도 그렇습니다. 모두 걱정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각자 다른 미래를 원하지요.”

“당신은 어떤 미래를 원합니까?”

린웨이는 즉답하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보았다. “전쟁이 나지 않는 미래입니다.”

“그건 모두가 원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 대답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세게 들렸다. 장천길은 그를 바라보았다.

린웨이가 말을 이었다. “전쟁이 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쟁이 날 것 같은 공포만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고, 전쟁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권력을 얻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평화라는 단어는 위험합니다. 너무 많은 사람이 그 단어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장천길은 그 말에 동의하고 싶지 않았지만, 완전히 반박할 수도 없었다. 린웨이는 바로 그 틈을 파고드는 사람이었다. 상대가 이미 알고 있지만 정치적 이유로 말하지 못하는 것을 대신 말해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설득자가 아니라 유혹자에 가깝다.

“의원님께 베이징 본 포럼의 공식 초청장을 다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공개 세션뿐 아니라 소수 라운드테이블에도 참석해 주셨으면 합니다.”

“누가 참석합니까?”

“한국에서는 여러 당의 실용적 인사들이 오실 겁니다. 일본, 대만, 러시아 쪽 전문가들도 제한적으로 참여합니다. 미국 쪽에서도 비공식 관찰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중국이 주최하는 행사에 미국 비공식 관찰자라.”

“세상은 공식 문서보다 비공식 의자로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린웨이는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직함이 길게 적혀 있었다. 그러나 장천길의 눈은 그 아래 아주 작은 글씨에서 멈췄다. ‘Regional Stability Initiative.’ 지역안정구상. 너무 넓고, 그래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이름이었다.

린웨이는 명함을 건네며 낮게 말했다. “상처를 입은 정치인은 두 부류입니다. 상처 때문에 약해지는 사람, 그리고 상처 덕분에 더 멀리 보는 사람.”

장천길은 명함을 받지 않고 잠시 그를 보았다. “누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린웨이는 미소를 지었다. “오래된 정치의 말입니다.”

“워싱턴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린웨이의 미소가 아주 조금 늦었다. “그렇다면 워싱턴도 오래된 말을 알고 있군요.”

장천길은 결국 명함을 받았다. 그 순간 노민지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장천길은 그것이 거리를 두는 몸짓인지, 누군가의 시야를 피하는 몸짓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호텔을 나설 때는 이미 저녁이 내려앉고 있었다. 로비의 큰 유리창 밖으로 퇴근길 차량의 불빛이 길게 이어졌다. 기자 몇 명이 문 앞에서 참석자들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포럼 주최 측은 이미 별도의 동선을 마련해 두었다. 장천길은 노민지와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차 문이 열리기 직전, 그의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


발신자 번호 없음.


문자는 단 한 줄이었다.


‘Blue Table confirmed. Target responded.’


장천길은 휴대전화를 노민지에게 보였다. 노민지의 얼굴이 굳었다. 그녀는 곧바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 기둥, 검은 승용차, 보안 카메라, 멀리 걸어가는 호텔 직원. 특별히 이상한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블루 테이블이 뭐지?” 장천길이 물었다.

노민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노 보좌관”

그녀는 아주 낮게 말했다. “오늘 비공개 라운드테이블을 내부에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습니다.”

“내부라면 누구 내부?”

노민지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다시 답이 되었다. 장천길은 휴대전화를 주머니에 넣었다. 방금 전까지 그는 자신이 포럼에 참석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달랐다. 자신은 참석한 것이 아니라 반응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마련한 테이블에 앉았고, 누군가가 기다리던 말을 했고, 누군가가 그 결과를 확인했다.

차가 호텔을 빠져나갈 때, 검은 세단 한 대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따라붙었다. 운전기사는 룸미러를 흘끗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천길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정치인은 너무 자주 뒤를 돌아보면 겁먹은 사람처럼 보인다. 대신 그는 창밖을 보며 린웨이의 말을 떠올렸다.

전쟁이 나지 않는 미래.

그 말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장천길에게는 협박처럼 들렸다.

같은 시각, 여의도의 작은 오피스텔 방에서 지명길은 노트북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사흘째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휴대전화는 꺼 둔 상태였다. 검은 USB의 원본 파일은 세 개의 저장장치로 나뉘어 복사되어 있었다. 하나는 책상 아래 빈 커피통 속에, 하나는 택배 상자 안에, 하나는 아직 그의 손에 있었다. 화면에는 방금 들어온 새 메일이 떠 있었다.


제목: BLUE_TABLE_guestlist_final.pdf

발신자: 없음.


지명길은 숨을 멈췄다. 파일을 열자 명단이 나타났다. 장천길, 한도윤, 하서연, 윤서경. 그리고 이름 몇 개가 흐릿하게 가려져 있었다. 마지막 페이지에는 손으로 쓴 듯한 영어 문장이 스캔되어 있었다.


‘Wounded candidates are easier to move.’


지명길은 그 문장을 읽고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그때 노트북 화면 오른쪽 아래에 작은 알림창이 떴다.


DEER-EYES has joined the session.


지명길은 반사적으로 노트북을 닫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화면 한가운데 새 문장이 나타났다.


‘Do not close it. If you close it, they will know you are afraid.’


그는 손을 멈췄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진 것 같았다. 누군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누군가 자신이 어떤 선택을 할지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송민희의 개인 메일함에도 같은 파일이 도착했다. 그녀는 회사 근처 카페 구석 자리에서 노트북을 열고 있었다. 배철중은 박도윤 사망 사건을 쓰지 말라고 했지만, 민희는 이미 사건 현장 주변 CCTV 목록과 경찰 비공식 브리핑 내용을 따로 정리하고 있었다. 새 메일의 제목을 보는 순간 그녀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BLUE_TABLE_guestlist_final.pdf


그녀가 파일을 열기 직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 없음. 민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통화가 끊길 때까지 기다렸다. 곧이어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파일을 열면 당신은 기자가 아니라 증인이 됩니다.’


민희는 화면을 바라보았다. 워싱턴의 마지막 밤부터 이어져 온 세 단어가 다시 떠올랐다. 장천길. 백야. 사슴눈. 이제 그 옆에 새 단어가 붙었다. 블루 테이블.

그녀는 천천히 파일을 열었다.

그 순간, 서울 어딘가의 닫힌 방에서 누군가 모니터를 보며 말했다.

“둘 다 열었습니다.”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다.

“좋아. 이제 베이징으로 보낸다.”

어둠 속 모니터에는 장천길과 린웨이가 악수하지 않은 채 명함만 주고받는 사진이 떠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짧은 주석이 붙어 있었다.


‘Subject resisted handshake. Accepted channel.’


상대는 악수를 거부했지만, 통로는 받아들였다.

그 주석을 적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만 화면 한쪽, 작고 흐릿한 사용자 표시만이 남아 있었다.


DEER-EYES.


- 계속-